(출처-조선일보 2013.09.03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얼마 전 그만 죽음의 현장을 보고 말았다. 불과 2초 만에 삶이 죽음의 문턱을 넘는 장면을 목격했다. 버스 중앙차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재빨리 1차선으로 들어서던 승용차가 속력을 줄이지 않은 채 달려오던 버스에 들이받히는 바람에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버스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두 버스 사이에 끼여버린 승용차의 운전석 창문 위로 한 남자의 주검이 젖은 빨래처럼 널리는 장면을 하릴없이 지켜봐야 했다. 저승으로 가는 문이 그렇게 쉽게 열리는 줄 누가 알았으랴?
미국에서 15년을 사는 동안 운전하며 졸았던 적이 몇 차례 있었음을 고백한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수시로 내가 조는 건 아닌지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귀국한 후 지난 20년간 나는 단 한 번도 졸음운전을 하지 않았다. 좌우에서 수시로 끼어드는 차들 때문이었다. 미국에선 종종 기분전환을 위해 차를 몰고 아내와 교외로 나가곤 했지만, 지금은 꼭 필요하지 않으면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 그리도 좋아하던 운전이 내 삶의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 됐다.
속도 제한이 없는 독일의 아우토반도 우리보다 훨씬 사고율이 낮다.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할 아주 단순한 규칙들이 있고 모두가 그걸 철저하게 준수하기 때문이다. "Keep right(우측 통행)!"은 언제나 가장 오른쪽 차선에서 주행해야 한다는 규칙이다. 그리고 추월하려면 반드시 좌측 차선으로 이동하여 속력을 내야 한다는 '좌측 추월'의 규칙이 있다. 이 두 규칙만 지키면 자연스레 주행선과 추월선이 분리되련만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는 좌우 양측에서 추월하려는 차들이 밀고 들어오기에 사고가 많이 난다.
사소한 규칙들이 모여서 선진사회를 만든다. 모든 국민이 하루아침에 성인군자로 거듭나야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소한 규칙이라도 너도나도 슬금슬금 어기기 시작하면 졸지에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는 모두가 엄수하는 규칙을 혼자 대놓고 어기고도 버젓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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