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03.12 주경철 서울대교수·서양근대사)
바흐(Bach)는 독일어로 실개천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작곡가 바흐의 이름을 두고 "그는 실개천이 아니라 바다(Meer)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말한 바 있다. 한 작은 음악회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연주를 들었을 때 베토벤의 이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이 위대한 작품은 원래 하프시코드나 클라비코드라는 고악기를 위해 쓴 곡이지만 지금은 피아노로 많이 연주되어서 '피아노 음악의 성서'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사실 이 곡은 당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던 새로운 조율법인 평균율의 보급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평균율은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서양 음악의 음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평균율의 장점은 작곡이나 연주를 할 때 자유롭게 조(調)를 옮길 수 있어서 풍요롭고 변화가 많은 곡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바흐는 아주 열심히 이 방식을 이용했고 또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유럽에서 19세기 이후 평균율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된 데에는 바흐의 공헌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서양 음악의 기본 원리가 처음 개발된 곳은 중국이었다. 명나라의 황자(皇子)로 태어난 주재육(朱載堉·1536~1611)은 음악·수학·역학 연구에 매진하였고, 1584년에 간행된 율학신설(律學新說)에서 그가 개발한 평균율 이론을 개진하였다. 아마도 이 이론을 유럽에 전한 것은 당시 중국 황실에까지 들어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을 것이다. 정작 중국에서는 이 음악 이론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유럽의 수학자들과 음악가들은 곧 이 이론의 혁신적인 장점을 이해했고 이로 인해 결국 서양 음악이 새롭게 경신되었다. 이제는 평균율에 따르지 않는 서양 음악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평균율 이전에 존재하던 도리아·프리지아·리디아·믹소리디아 같은 다양한 선법(旋法)들과 그에 따르는 고음악들은 거의 사라져 갔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일상적으로 듣고 배운 음악체계는 이처럼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져 유럽으로 전해진 다음 전 세계로 퍼져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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