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11.30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첨단 생명과학의 세계에 구전문화가 있다면 믿을 텐가? 물리학자들은 종종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앞세우고 생물학계에도 그들만큼 비상한 두뇌가 있느냐고 윽박지른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내세우는 분이 한 분 있다. 바로 전설적인 영국의 유전학자 잭 홀데인(J. B. S. Haldane)이다. 내가 그를 소개하며 굳이 '전설적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그에 관한 많은 일화들이 아직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런던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한 그는 물론 많은 연구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대학 앞 선술집 등 여러 형태의 사석에서 남긴 촌철살인의 우문현답들로 더 유명하다. 어느 날 진화학자로서 조물주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곧바로 조물주께서는 "딱정벌레에 대해 지나친 호감(an inordinate fondness for beetles)을 가졌던 분이었던 것 같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딱정벌레는 기재된 종만 무려 35만에 이르는데, 이는 전체 곤충 종수의 거의 절반이다. 홀데인의 상상 속에는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던 그 엿새 중 어느 날 진흙으로 딱정벌레 한 마리를 빚으신 다음 숨을 불어넣으시곤 스스로 만드신 딱정벌레의 귀여움에 정신이 빠져 멈추지 못하고 계속 딱정벌레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던 하느님의 사뭇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그려졌던 것이다.
또 어느 날 누군가가 그에게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만일 형제 둘이나 사촌 여덟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버릴 용의가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형제는 평균적으로 서로 유전자의 50%(1/2), 사촌은 12.5%(1/8)를 공유한다. 유전학적으로는 사촌을 팔촌이라 불렀으면 더 정확했을 뻔했다. 홀데인은 순간적으로 형제 둘 또는 사촌 여덟의 유전자를 합하면 내 유전자만큼 된다는 계산을 해낸 것이다.
그가 순간적으로 내뱉었다는 이 같은 말들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고 있다. 홀데인은 1964년 바로 오늘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그의 말을 전하던 양반들도 이제 연로하여 하나 둘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분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홀데인 어록을 정리해둬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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