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04.09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과거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글 가운데 양주동 선생의 '몇 어찌'라는 수필이 있다. 여기에는 한적 공부만 해 왔던 선생이 중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처음 접했을 때 교과서에서 낯선 어휘들을 보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기괴한' 말 가운데 하나가 기하(幾何)라는 단어였다. 몇 기(幾) 어찌 하(何), 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몇 어찌'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던 그에게 수학 선생은 이렇게 설명한다. "가로되, 영어의 '지오메트리'(측지술)를, 중국 명나라 말기의 서광계가 중국어로 옮길 때, 이 말에서 '지오'(땅)를 따서 '지허'('기하'의 중국음)라 음역한 것인데, 이를 우리는 우리 한자음을 따라 '기하'라 하게 된 것이다." 우리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모두 기하라는 말은 지오메트리(geometry)의 역어로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원로 경제학자이신 정기준 선생께서 이 문제에 대해 대단히 흥미로운 글을 써서 수학학회지에 발표하셨다. 그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하면 이러하다. 1607년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는 유클리드의 'Elementa'를 '幾何原本'이라는 책이름으로 번역했는데, 제1권의 머리에 "무릇 역법·지리·악률·산장·기예·공교 등 여러 가지 도(度)와 수(數)를 다루는 분야는 모두 십부(十府)에 의뢰할 때 그 가운데 기하부(幾何府)에 속한다"는 아리송한 말을 써놓았다. 십부라는 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10카테고리이며, 그 가운데 두 번째 것이 수량카테고리이다. 수량카테고리는 그리스어로 peson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영어로 how much이고, 이를 직역하면 기하(幾何, 중국어에서 '얼마'의 뜻으로 쓰이는 부사이다)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나 저울로 재서 알 수 있는 연속수량(連續數量)과, 세어서 알 수 있는 이산수량(離散數量)이 모두 이 카테고리에 속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리치와 서광계는 이 두 수량을 각각 도와 수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정리하면 기하라는 단어는 지오메트리의 음역이 아니라, 도와 수를 다루는 모든 분야, 곧 수학 일반을 가리킨다. 우리가 400년 동안 당연시했던 오해가 드디어 풀린 것이다. 이런 일들이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이(幾何!)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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