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의 뇌관은 이념 대립과 양극화 정치의 극복이다
광장에서 여러 사람 두루 만나고 늘 곁에 있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야당을 찾아 협치를 부탁하는 모습은 신선했고, 친노(親盧)와 친문(親文)이 아닌 인재 발탁도 일단 합격점을 받았다. 광화문 시대란 ‘시민 주권의 시대’를 의미한다. 헌재의 역사적 판결과 함께 굉음을 울리며 광화문광장에 내려앉은 시민주권호(號). 그 조종사에 임명된 신임 대통령은 이렇게 화답했다. ‘주요 사안은 직접 브리핑하고 퇴근길에 마주치는 시민과 소주 한잔 나누겠다’고. 야당의 지원사격이 절대적인 다당 구도에서 최고의 우군은 주권 시민임을 깨달았다는 강력한 암시였다. 그런데 실행이 문제다. 집권 초기 그렇게 말하지 않은 대통령은 없었으므로.
이 ‘광화문 시대’를 가장 열렬히 연출한 조선의 군주는 정조였다. 시파(時派)와 벽파(僻派), 남인과 북인이 격돌하는 붕당체제를 돌파하는 전략으로 정조가 고안한 게 거둥행사와 탕평책이었다. 광장에서 민은(民隱)을 직접 듣는 군주에게 백성은 상언과 격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날 촛불시위다. 매년 수십 차례를 시행했고 지방행차인 능행(陵幸)도 모두 66회나 실행했다. 인재 등용에 차별은 없다는 ‘입현무방(立賢無方)’, 지방 유생을 뽑아올리는 ‘일시경외(一視京外)’ 원칙으로 탕평책을 밀고 나갔다. 소통은 정조의 첨단 무기였다. 사도세자를 죽인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는 자주 편지를 해서 고급 정보를 주고받았다. 가끔 내용이 누설되자 질책 편지를 보냈다. “매번 입조심하라 일렀거늘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다.” 몸을 사리고 입을 봉한 대신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시사(時事)를 통렬히 따져 각을 세워야지 용렬하게 눈치만 보는가? 그러려면 관모를 벗고 떠나라”(안대회, ‘정조의 비밀편지’). 승정원 사령은 편지 배달에 눈코 뜰 새 없었다. 요즘 같으면 카톡 문자 하나면 족하다.
터널을 빠져나온 한국 정치에 386세대가 돌아왔다! 10년의 와신상담에 ‘혁명세대’의 진보정치는 얼마나 숙성했는가. 비서실장 임종석은 주사파의 집요한 틈입에 대비하고 있는지, 민주당은 진보정치의 이념과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묻고 싶다. 혹시 2003년 ‘4대 개혁’과 같은 거칠고 과격한 칼을 빼들지 않을까 우려해서 하는 말이다. ‘국보법 폐지’는 용공 공포심을 유발했고, 친일 청산은 역사적 상처를 헤집었다. 기자들은 관공서에서 쫓겨났다. 4대 개혁의 명분은 정당했지만 종교계, 언론계, 보수집단의 격렬한 저항을 돌파하지 못했다. 설마 ‘세금폭탄에 대비하라’는 말은 또 안 하겠지만, 진보정치는 ‘도덕경제’에 집착해 외환위기 회복기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경제계를 결빙시켰다. 합의 없는 닥공(닥치고 공격)과 나홀로 질주는 통치력의 심각한 균열로 귀결됐다.
지난 10년 보수집권의 실패 원인이 보수 내부에 있듯이, 10년 전 진보정권이 붕괴한 이유도 진보 내부에 있었다. 정권을 둘러싼 이념투사들은 거칠고 과격했다. 그들을 ‘교조적 진보’로 떼냈던 정권 핵심층을 이념투사들은 ‘배신한 진보’로 맞받아쳤다. 많은 서민이 ‘시끄러운 진보’에 신물을 냈다. 이념 대립과 양극화 정치의 극복이 진보정치의 뇌관이다. 정작 경계의 대상은 내부에 있다. 강성 노조와 진보단체, 과격한 사회단체가 광화문광장의 입장권을 독점하지 않기를 바란다. 광장이 전장(戰場)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다. 광장에 출근해 여러 부류의 사람을 두루 만나는 대통령, 성공하지 못해도 늘 곁에 있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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