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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알퍼의 한국 일기] 한국의 傳貰가 창조한 세계 최고의 이사업체들

바람아님 2017. 5. 23. 07:09

(조선일보 2017.05.23 팀 알퍼 칼럼니스트)


집값 살인적인 런던에 살 때 월급 절반 이상을 월세로 내

한국 전세는 저축 꿈 갖게 해… 대신 2년마다 이사하는 고충

한국의 이사 업체는 세계 최고… 유튜브엔 神技의 이사 동영상도


팀 알퍼 칼럼니스트한국에 거주한 11년 동안, 이제껏 내가 만나 온 한국인 대부분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전세요"라는 내 대답은 언제나 질문하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내가 알기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세(傳貰) 제도를 가진 나라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전세금은 고공행진하며 수요 또한 줄고 있으니, 

어쩌면 내 오랜 대답도 조만간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게 전세 제도는 일종의 혁명과도 같았다. 

내 모국인 영국에선 두 가지―비싼 월세로 집을 임대하거나 이자는 적지만 아주 오랜 기간(35~40년 정도)에 걸쳐 상환하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나는 신발 상자만큼이나 작은 런던의 원룸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한 달치 급여의 60%를 월세로 내야만 했다. 

그런 내게 한국의 전세는 인생에서 돈을 모을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로 느껴졌다.


런던 주택의 평균 가격은 10억원 정도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은 현실적으로 런던에서 내 집 마련이 쉽지 않다. 

만약 내가 이십대 후반에 대출을 받아 런던에서 집을 샀다면, 아마 일흔이 될 때까지 대출에 발목 잡힌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한국에 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반면 한국에서는 전세 제도 때문에 이사를 무척이나 자주 해야 했다. 

2년 단위 전세 계약을 하는데 전세금이 빠른 속도로 오른다는 것은 세입자들이 그만큼 이사를 자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세가 없는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모기지를 택하기 때문에 이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최근 한 조사로는 영국 성인의 60%가 15년 이상 이사한 적이 없다고 하며, 10%는 30년 넘게 같은 집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과 한국의 이러한 차이는 봄이 되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봄철 한국의 주택가는 소파, TV, 옷 상자들을 수십m 높이로 올리고 내리는 거대한 사다리차들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소음으로 무척 시끄러워진다.


[팀 알퍼의 한국 일기] 한국의 傳貰가 창조한 세계 최고의 이사업체들

/이철원 기자


포장이사 같은 건 영국에 없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사가 하나의 큰 비즈니스로 자리 잡고 이사에 대한 각종 속설과 금기도 많다.

이사하기에 특별히 좋은 날인 '손 없는 날'만 봐도 그날은 악귀가 돌아다니지 않아 사람들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손 없는 날을 미리 알진 못해도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이른 아침부터 울려 퍼지는 사다리차가 거대한 팔을 뻗치는 

소리로 그날이 왔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난번 아들을 보려고 한국에 온 아버지는 이사 업체가 짐을 옮기는 장면을 거의 한 시간 내내 경이롭게 바라보셨다. 

유튜브엔 서양에서 온 여행자와 거주자들이 한국 이사 업체가 얼마나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작업하는지 놀라워하며 

찍어 올린 수많은 동영상으로 가득하다. 이 중 일부는 12만번 넘는 뷰와 수백건의 댓글 기록을 자랑한다. 

영국 사람들은 한국인의 이사 장면에 마치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 한 장면 보듯 감탄하는 눈길을 보낸다.


영국에서는 이사를 대부분 스스로 해결한다. 

작은 짐은 일일이 손으로 상자에 넣어 포장하고 커다란 가구는 친구나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여 나른다. 

이사를 마치고 나면 온몸이 쑤시니 영국의 이사는 이사 업체 대신 물리치료사들에게 많은 일거리를 제공한다. 

이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큰 트럭을 빌려 이삿짐을 직접 옮긴다. 

이는 시간과 노력, 고통이 수반되는 매우 아날로그적인 방법이다. 이런 이유로 내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서양인은 

기다란 사다리차와 함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조직적인 한국 이사 업체의 작업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한국에 나만큼 오래 거주한 이방인이라면 왜 한국 사람들이 무서울 만큼 효율적이고 빠르게 이사 능력을 진화시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이사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하다. 

업계 최고를 목표로 하는 이사 업체들이 꼼꼼하고 숙련된 사람만을 고용하고 최고의 사다리차 기사들의 조력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들은 깔끔하고 빠른 작업과 친절함으로 좋은 평판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다시 선택을 받아야 하는 

압박 속에 작업한다. 

한국에 살면서 나는 온갖 종류의 이사를 경험했다. 

대충 2년에 한 번씩 이사하면서 건드리는 물건 대부분을 망가뜨리는 싸구려 이사 업체부터 최고급 서비스를 하는 업체까지 

모두 거쳐봤다. 비싼 업체들은 거실 바닥 떨어진 음식을 집어먹어도 될 정도로 새집을 깨끗하게 정리정돈했다. 

그런 업체에는 성수기에 영국을 다녀올 비행기표를 사고도 남을 정도의 비용을 내야 했다.


일사불란한 이사 업체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경비 아저씨와 이사 업체 직원 간에 종종 벌어지는 

열띤 언쟁을 목격하는 것이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돌아온 경비 아저씨는 커다란 이삿짐 트럭 2대가 주민 차량 8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점령한 것과 자신이 아침 내내 공들여 청소한 공터에 널브러져 있는 이사 박스를 발견하고 화가 치민다.

하지만 두 팔 가득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이사 업체 직원들 역시 성난 경비 아저씨의 고함을 좋게 받아줄 기분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