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북스토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장미의 '이름'은 무엇인가
입력 : 2016.09.04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기호학자이자 중세학자, 그리고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이탈리아의 석학 움베르토 에코.
누가 보기에도 거대한 체구를 가졌던 그는 거의 매일 저녁마다 춤을 즐겼다고 한다.
그것도 매우 우아하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코는 언제나 너무 늦지 않은 밤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아니, 집 그 자체가 아니라 수 천 권의 책으로 빡빡하게 채워진 자신의 서재로 돌아간 것이다.
미쳐버릴 정도로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은 세상.
에코에게 서재는 그만을 위한 영원한 피신처였다. 마치 배트맨의 동굴같이 말이다.
“남들은 50세가 되면 가족을 버리지만, 자신은 잔인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중세기 수도원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던
에코는 어느 날 갑자기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책을 쓰기 시작한다. 유명교수로서 겪을 수도 있는 불명예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쓰기 시작한 소설. 에코는 드디어 더 이상 중세 수도승을 연구만 하는 학자가 아닌, 한 글, 한 글 어렵게 적어내는
수도승이 스스로 되어버린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사실 소설책이 아니다. 소설인 척 하는 철학 책일 뿐이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을 연구하기도 한 에코는 철학책을 소설책이라 착각하고
읽을 독자들을 생각하며 얼마나 즐거워했을까?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보편성’ 이었다.
‘고양이’, ‘사각형’, ‘행복’, ‘평화’ 등 우리는 다양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수 백 종의 다양한 고양이들만이 아니라, 뛰어다니고 앉아있는 고양이 모두 다르게 생겼다.
그렇다면 보편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플라톤은 모든 개념은 이데아 세상에만 존재하는 완벽한 개념의 그림자라는 ‘실념론’(realism)을 주장한 바 있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기에, 개념의 유일한 보편성은 그들 간의 동일한
이름 뿐이라는 ‘유명론’(nominalism)을 제시했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지극히 유명론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어차피 그 아름다웠던 장미가 남기는 것은 ‘장미’라는 이름 뿐이다.
마녀사냥, 종교전쟁, 인종차별. 현실적 검증 없는 개념은 무의미하지만 인간은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이름’을 위해
서로를 죽이고 학대한다.
![[김대식의 북스토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장미의 '이름'은 무엇인가](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8/29/2016082901077_1.jpg)
《장미의 이름》에서 범인은 단 하나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을 살인한다. 웃음과 유머를 허락하지
않는 중세 철학과는 달리 <시학 2편>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코미디의
중요성을 주장하니 말이다.
사실 세상은 무의미하다는 진실은 포스트모던스러운 미소를 짓게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의미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들은 언제나 폭력과 불행의 시작이 된다.
장미의 이름 : 움베르토 에코 장편소설. 상.하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열린책들/ 2015/ 439-866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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