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2.09 이명진 논설위원)
총장 퇴임 후 정치 활동 비판한 '용기있는 외침' 나쁜 관행 밀어내
'미투', 검찰개혁으로 확대 조짐… 비리 눈감는 관행 없어져야
이명진 논설위원
수원지검 특수부 임춘택 검사가 '사고(事故)'를 친 건 1997년 1월 말이다.
국회가 검찰의 정치적 중립 보장 차원에서 검찰총장이 퇴임 후 다른 공직을 맡는 걸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키자 검찰 지휘부가 발끈했다. 검찰총장이 법무장관, 감사원장, 국정원장으로 가거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일이 빈번하던 시절이었다.
총장과 고검장들은 "위헌(違憲) 조항을 두고 볼 수 없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그러자 "위헌이 맞다"며 맞장구치는 앵무새가 검찰에 넘쳐났다.
임춘택 검사는 수뇌부 논리에 어깃장 놓는 내용의 원고를 밤새 써 신문기자 친구에게 전했다.
"총장을 마치고 바로 법무장관이 된 김기춘씨는 특정 정당을 위해 선거 활동을 하다 검찰에 불명예를 안겼다"
"김도언 전 총장은 임기가 끝나자마자 집권당 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검찰에 치욕을 안겼다" ….
전직 총장들의 실명(實名)까지 거론해가며 지휘부를 조목조목 비판한 글이 조선일보에 실리자 검찰은 발칵 뒤집혔다.
임 검사는 다음 날 특수부에서 쫓겨났다. 그 뒤 5년간 인사에서 서울 근처엔 얼씬도 못 했다.
검사장 승진을 못 하고 옷을 벗었다. 모두 가만있는데 혼자 나서서 할 말을 한 대가(代價)였다.
그로부터 꼭 21년 만에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의 '미투(MeToo)'를 보며 검찰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서 검사가 추행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검사는 한둘이 아니었다.
분명 잘못된 일이란 걸 알았을 텐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피해자 의사가 중요한 게 아니냐'는 건 비겁한 침묵을
정당화하려는 변명에 불과하다. 가해자는 승승장구해 검찰국장이 됐는데, 서 검사는 "너 하나 병신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는
말을 들었고, 인사 보복을 당했다고 했다.
검찰 내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가 4일 저녁 서울 송파구 동부지검 내에 설치된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에서 피해자 및 참고인 조사를 받고 나오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 검사를 시작으로 검사들의 내부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이젠 단순히 '미투' 문제가 아니다.
수사와 관련된 외압과 부당한 지시를 폭로한 검사도 나왔다. 전례(前例)가 없는 일이다.
'미투'에 동참한 임은정 검사는 "사건을 단면적으로 보지 말고 검찰 개혁으로 확대해서 봐달라. 권력의 문제"라고 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 검사들이 부조리를 고발하려 해도 상사들은 '가만있으라'고 해왔다.
말을 듣지 않으면 '또라이' '항명' '선배 잡는 꽃뱀'이 된다.
인사에서 지방으로, 고검으로 쫓아내 결국 옷을 벗게 만든다.
그러면서 생긴 게 비리를 눈감아주고 그 대가로 보상을 챙기는 '침묵의 카르텔'이다.
몇 해 전 검찰 고위 간부 성추문이 터졌을 때 사정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증거법상으로는 무혐의'라고 우기는 검사를 보았다.
야당 의원은 구속하고 여당 의원은 불구속으로 빼주고 요직으로 간 부장검사도 있었다.
한 해 수천 명씩 법조 브로커를 처벌해 온 검찰에서 '브로커 검사장'이 활개 칠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검찰총장 퇴임 후 공직 제한법'은 위헌 결정을 받았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현실에선 다른 일이 벌어졌다. 1999년 임명된 박순용 총장 이래 다른 공직에 간 총장은 없다.
마지막 공직이 된 것이다.
한 검사의 '용기 있는 외침'이 법과 제도로도 어쩌지 못한 나쁜 관행을 밀어낸 사례로 검찰에서 회자된다.
지금 터져 나오는 검사들의 목소리도 괴물이 돼 버린 검찰을 변화시키는 밀알이 되기를 기대한다.
검찰에는 권력을 좇는 정치 검사, 큰 칼 휘두르는 특수부 검사보다 평범하지만 묵묵히 맡은 일 해내는 검사가 훨씬 더 많다.
그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게 해줘야 검찰이 바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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