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2.20. 10:36
“그의 태양처럼 밝은 미소에 반했어요.” “공주는 나를 달처럼 조용히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달달한 이 사랑 고백이 지난 해 가을 일본인들을 흐뭇하게 했습니다. 아키히토(明仁ㆍ85) 일왕의 맏손녀인 마코(眞子ㆍ27) 공주가 도쿄 국제기독교대 1학년 때 만난 대학 동기 고무로 게이(小室圭ㆍ27)와 결혼을 하겠다고 발표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2005년 일왕의 딸 사야코(淸子) 공주의 결혼 이후 오랜만의 왕실 결혼인데다, 대학 시절 만나 사랑을 키워 온 소박한 러브 스토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천재지변 등의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공주의 결혼이 갑자기 연기되면서, 일본에선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합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키히토 일왕이 2016년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생전에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퇴위식이 2019년 4월로 예정된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왕실의 큰 행사들을 마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식을 올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 약혼자 어머니의 빚...가정 문제가 원인?
하지만 일본 언론들은 약혼자 고무로 가정의 경제적 상황이 결혼을 연기하는 더 큰 원인이 되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고무로는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지금은 일본의 한 법률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원입니다. 안정적으로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집안은 유복한 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간여성’ ‘주간문춘’ 등 일본 주간지들은 지난해 마코 공주의 결혼 발표가 나온 후부터 고무로 모친인 고무로 가요(佳代)의 ‘금전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습니다. 2002년 남편과 사별한 고무로의 모친이 2010년부터 교제했던 남성에게 수년에 걸쳐 400만엔(약 4000만원)을 빌렸다는 것이죠. 이를 아들의 학비나 유학 비용으로 사용했습니다.
“고무로 씨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불거진 문제가 이런 이미지를 해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마코 공주는 이런 문제들을 원만히 해결하고 국민들을 안심시킨 후 결혼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판단한 듯 합니다.” 논란이 가시지 않을 경우, 결혼을 취소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 부계 승계만 인정하는 ‘황실전범(皇室典範)’. 여성은 일반인과 결혼하면 왕족 지위 박탈
국민들이 마코 공주의 결혼 이후 생활에 대해 걱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왕가의 규칙·제도 등을 정한 법률인 ‘황실전범(皇室典範)’에 따라 일본 왕실 여성은 일반인 남성과 결혼하면 왕족의 지위를 잃게 됩니다.(남성은 결혼 후에도 왕족 신분이 유지되고, 배우자 역시 왕족이 되죠.)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꿔야 하고, 왕족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받을 수 없습니다. 고무로의 연봉은 200만엔(약 200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도쿄대 종합연구박물관에서 특임연구원으로 일하는 공주의 수입을 더한다 하더라도 윤택한 생활은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 40년 넘게 딸만 태어난 왕실...대 끊길 위험 코 앞에
문제는 남계남자의 원칙을 적용할 경우 현재 일본 왕실에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남성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현재 일본 왕족은 총 19명인데, 이 중 14명이 여성입니다. 왕족 남성 5명 중 아키히토 일왕과 그의 유일한 남동생 마사히토(正仁) 친왕은 80대의 고령입니다. 게다가 마사히토 친왕에겐 자녀가 없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의 숙부인 다카히토(崇仁) 친왕(2016년 별세)의 자녀들도 딸만 낳거나 결혼을 하지 않아, 이 집안에도 왕위 계승 후보가 될 남성이 없습니다.
가코 공주에 이어 집안의 미혼 여성들이 모두 결혼을 해 왕적이 사라지면, 왕실에 50대 이하 왕족은 히사히토 왕자 혼자만 남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즉, 현재 12살인 히사히토 왕자에게서 이후 아들이 태어나지 않을 경우, 말 그대로 ‘왕실의 대가 끊기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왕실 대폭 축소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일본에는 여러 분파의 왕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 왕위 승계에 큰 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1946년 왕이 ‘인간선언’을 하면서 1947년 1월 왕실의 축소를 골자로 하는 ‘황실전범’이 제정됩니다. 이 법으로 다이쇼(大正) 일왕 직계 자손을 제외한 11개 분파 51명의 왕족이 신분을 잃고 민간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일부일처제의 도입으로 왕실의 후궁 제도가 폐지되면서 출산 역시 급격하게 줄어들죠.
━ “시대에 뒤쳐진 법 바꿔야”..아베 총리는 반대
그런데 최근 아키히토 일왕의 조기 퇴위 발표와 마코 공주의 결혼 소식이 나오면서 이번 기회에 시대에 맞지 않는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집권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도 한 방송에서 “여성 존중 시대에 일왕가의 ‘남계남자’ 계승 원칙은 시대에 뒤쳐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중심으로 한 보수 진영은 “만세일계의 전통을 깨서는 안된다”며 굳건하게 반대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2016년에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일왕의 왕위 계승권을 남자, 남계 왕족에게만 주는 것은 여성 차별”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었다가 일본 정부의 강력한 반발로 채택이 무산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황실전범은) 차별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위원회가 우리 왕실 규정에 대해서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죠.
시대는 변한 지 오래인데, 일본 왕실은 아직 저 먼 과거에 머물고 있는 형국입니다. 국민 대다수의 평등 의식에도,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는 일본 왕실의 계승 문제, 과연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요. 아키히토 일왕 퇴위를 계기로 왕실 관련 법안을 대폭 손 봐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국회에서 제정한 특별법 형식으로 이 사안을 처리하려는 아베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변화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 일본에는 여성 왕이 있었다!
「 잠깐. 이 기사를 읽고 의문이 드셨을 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역사에는 여성 일왕이 실재했다. 그런데 여자가 왕이 될 수 없다니 무슨 소리인가.
즉 여성 일왕과 여계 일왕 제도는 구분되어 논의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왕족이 극소수에, 왕족끼리의 결혼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두 문제를 분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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