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5.30. 01:23
봄바람처럼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루키는 그의 수필에서 “막 구운 따뜻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등으로 소확행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기존에는 행복을 먼 미래에나 도달할 수 있는 큰 목표의 성취 이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소확행은 지금 현재 삶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작고도 확실한 행복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소확행을 추구하는 시대의 도래가 반갑다. 무엇보다도 과거 산업화 시대를 산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던 획일화된 행복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하면서도 개별적인 행복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기존에는 무엇이 행복인지 개인이 정했다기보다는 사회가 이러이러한 것을 욕망하라고 결정하고 주입했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월급 많이 주는 큰 회사에 취직한 후 결혼해서 아이들 가르치며 아파트 평수를 넓힐수록 행복이 온다고 말이다. 하지만 소확행은 행복의 기준을 사회가 아닌 개개인이 정하라고 권한다. 그래서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행복들이 무한하게 생겨날 수 있다.
소확행을 찾는 요즘 세대는 그렇게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어찌 보면 지금 주어진 자기 삶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태도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최근에 읽은 책 『조그맣게 살 거야』에서 “바람의 향기와 공기의 온도, 나뭇잎의 색깔, 시시때때로 미묘하게 변하는 길거리의 풍경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천천히 걷고 느리게 생각하다 보면, 말수는 줄어들지만 웃을 일은 더 많아진다”라는 문장을 만났다. 행복은 집이나 자동차같이 비싸고 갖기 어려운 대상들을 소유하고 나서 느끼는 감정이 아닌, 지금 현재 시간을 내가 어떻게 온전히 쓰는가, 자연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는가가 관건이 된다.
나의 소확행은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렵지 않게 몇 가지가 떠올랐다. 우선 차를 마시며 좋아하는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듣는 시간. 전기현씨가 진행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나 ‘강민석의 소울 케이크’를 즐겨 듣는다. 진행자들의 친절한 음악 소개를 통해 마음에 드는 새로운 음악을 만나게 되면 우연히 길에서 보물을 주운 듯 마음은 엄청난 부자가 된다.
더불어 나만의 퀘렌시아, 쉼의 공간인 삼청공원을 걷고 있을 때도 참 행복하다. 삼청공원 안에는 나무 다섯 그루 아래 물소리를 들으며 쉴 수 있는 예쁜 벤치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 잠시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마음은 지극한 평화에 가 닿는다.
새로 나온 책 가운데 몇 권을 골라 서점에 있는 의자에 앉아 여유 있게 책을 보는 시간도 행복감을 준다. 또한 한 달에 한 번씩,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도 나에게는 중요한 소확행이다. 이런 시간은 삶이 던지는 예기치 못한 커브볼을 맞고도 담담히 버틸 수 있는 큰 힘을 준다. 괴테가 그랬던가. 신선한 공기와 빛나는 태양, 친구들의 사랑만 있다면 삶을 낙담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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