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시각]터키 참전용사와 현충일/[천자 칼럼] 현충원 산책길

바람아님 2018. 6. 7. 07:53

[시각]터키 참전용사와 현충일


서울경제 2018.06.06. 17:05

  최근 다녀온 터키 출장에서의 일이다. 터키의 소도시 이스파르타를 방문한 원래 목적은 국제적 규모의 장미축제 때문이었다. 전 세계 장미 관련 제품 유통량의 65% 이상을 생산하는 곳인지라 외국 기자들의 취재 열기가 제법 뜨거웠고 그 같은 분위기가 현지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다음날 취재 일정 중간에 예정에 없던 ‘한국전쟁 참전용사와의 만남’이 끼어들었다. 언론을 통해 ‘형제의 나라’ 한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참전용사들이 “꼭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귀찮았다.

한글이 적힌 훈장을 주렁주렁 가슴에 달고 후덥지근한 낮 기온이 무색한 털모자를 쓴 참전용사들은 후세인(90)과 파익(88), 뮤닐(88)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스파르타에만 한국전 참전용사 생존자가 총 28명인데 그중 건강이 양호한 편인 3명이 “한국 사람들을 만나겠다”며 찾아온 것이었다. 현지 재향군인회와 가족들이 동행해 이들의 불편한 거동을 도왔다.


한국전쟁 당시 갓 스무 살 안팎이던 이 ‘청년들’은 이름도 생소하고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한국을 돕겠다며 배에 몸을 실었다. 4,500명이 배 세 척에 나눠 탔고 지중해를 출발해 인천항에 닿기까지 29일이 걸렸다. 배에서 내려 처음 만난, 며칠씩 굶은 한국 사람들을 보고서는 지급받은 군용도시락을 나눠 먹었더랬다. 터키에서는 상상도 못할 한겨울 추위와 싸워가며 전쟁에 참여했지만 나중에는 중국 군인들에게 밀렸다며 ‘1·4후퇴’ 당시를 회고했다.


대략 70년 전, 정확히는 68년 전의 기억을 되짚는 늙은 용사의 눈동자는 ‘여전히 생생한 기억’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한국에 가볼 기회는 없었지만 늘 한국을 생각한다는 ‘할아버지들’의 말에 취재진 중 한 사람이 “남의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저렇게 싸워주기가 쉬운 일 아닙니다. 우리 큰절이라도 합시다”라고 즉석 제안했다. 신을 향해서만 엎드리는 그들이 우리식 ‘절’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차치하고 일제히 큰절을 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심을 느낀 이들은 “뉴스로 접했는데 남한과 북한이 지금처럼 좋은 때가 없는 것 같다” “독일처럼 남북한이 합쳐 큰 나라가 되기 바란다”고 기원했다.


최고령인 후세인이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지만 또 한국에서 전쟁이 난다면, 이 늙은이라도 필요하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망설임 없이 또 가겠다”고 진지하게 말하자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도와준 나라에서 온 우리에게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은혜를 갚아라’가 아니라 ‘꼭 잘 살아야 한다’는 축복과 기원이었다.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기억하는 날, 현충일이 지났다. 고마운 이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혹은 겨우 일 년에 하루만 그 고마움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기를 청한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쓰인 오늘의 역사이니 말이다.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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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현충원 산책길

한국경제 2018.06.06. 00:17

      

서울 사람들이 지척에 두고도 잘 안 가게 되는 곳들이 있다. 63빌딩 전망대, 한강유람선, 그리고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일 것이다. 호국영령들의 넋이 잠든 현충원은 대개 엄숙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장소로 여겨 선뜻 발길이 안 간다. 하지만 현충원의 별칭이 ‘호국(護國)공원’이듯, 도심 속 최고의 공원이란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954년 국군묘지로 출발한 현충원은 총 143만㎡에 6·25전쟁, 월남전 등에서 산화한 전몰 군경과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등의 묘(墓) 약 5만9000기가 조성돼 있다. 1965년 국립묘지, 2005년 서울현충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충원에 들어서면 숙연해진다. 묘비의 생몰연도를 보면 불과 열아홉, 스무 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 많다. 그래선지 시인들은 “죽어서도 나란히를 하고 있는 병사들”(박봉순 ‘현충일에’)의 묘비 앞에서 “그대들 꽃같은 나이 앞에/살아있음이 미안스럽고/살아 주절거려 온 언어가 송구스럽고/ 해마다 현충일에 늦잠 잔 것도 용서받고 싶다”(유안진 ‘국군묘지에 와서’)고 고백했지 싶다.


현충원은 관악산에서 뻗어나온 야트막한 공작봉(166m)이 좌우를 호위하고 한강과 맞닿아 있다. 6·25 직후 5만 기 이상 들어가면서 인가가 드물고 배수가 잘 되는 곳을 물색하다 급히 정한 자리다. 그런데 잡고 보니 선조의 할머니이자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安)씨 묘역이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현충원을 빙 둘러 3㎞의 둘레길이 있다. 언덕길, 꽃길, 숲길이 고루 있어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체력단련 시설도 있다. 300년 넘은 느티나무를 비롯해 벚꽃길, 이팝나무길, 은행나무길이 철따라 아름답다. 조망대에서 바라보는 한강 풍경도 일품이다. 주변 숲은 50년간 출입이 통제돼 울창하고 딱따구리, 파랑새, 소쩍새 등 조류가 26종이나 서식한다.


잔디광장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을 보노라면,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들께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항일 의병대장, 임시정부 요인, 역대 대통령, 국가유공자 묘역은 그 자체로 역사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자녀들과 함께 꼭 현충원을 둘러보기를 권한다. 다만 현충일에는 유가족에게 양보하는 게 좋겠다.

안타깝게도 전체 묘의 6할을 차지하는 6·25 전몰 장병을 찾는 이들이 점점 줄고 있다고 한다. 주말에 현충원을 산책하며 그분들께 꽃 한 송이라도 놓아드리자.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