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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명저] "보수는 이상과 현실 간극 메우는 실용철학"

바람아님 2018. 12. 14. 08:16

한국경제 2018.11.28 17:30


로버트 니스벳 《보수주의》


미국의 사회학자인 로버트 니스벳(1913~1996)이 1986년 출간한 《보수주의》는 ‘보수주의 교의(敎義)’를 담은 책으로 명성이 높다. 이 책은 ‘보수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사상적 토대로 하고 있다. 버크가 1790년 쓴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은 보수주의를 처음으로 체계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수주의에 대한 조명은 이런 시대적 배경이 말해 주듯 프랑스 혁명에 대한 거부감에서 시작됐다. 버크와 니스벳은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던 수많은 파괴와 학살을 비판했다. 독선에 빠진 혁명 엘리트의 과격한 설계주의(設計主義)가 초래하는 참상을 막기 위해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도덕과 전통을 중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선적 설계주의가 빚은 인류 참상

     
“프랑스 혁명이 말하는 인간은 자유, 평등, 박애가 넘치는 합리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데다 지극히 감정적이다. 보수주의는 ‘인간과 세상은 불완전하다’는 이른바 ‘불완전성’에 뿌리를 두는 현실철학이다. 도덕과 윤리 등 시대와 계층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보편적 가치를 잣대 삼아 사리 분별과 신중함으로 현재의 모순을 개선하려는 정신이다. 보수주의자는 기득권자가 아니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깨닫고 점진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실용적인 사람이다.”

니스벳이 말하는 보수주의는 과거 퇴행적인 주의·주장이 아니다. 진보주의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속도에서는 급진주의, 내용에서는 사회주의인 설계주의에 대비되는 것이다. 니스벳은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을 보수주의와 급진·설계주의를 구분하는 사건으로 꼽았다. 두 사건 모두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었지만 전개 방식과 결과는 크게 달랐다.

“미국 독립전쟁은 식민지인이 그들의 이익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 벌인 것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 혁명은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혁명 지도자들은 교육과 무력, 공포를 통해 개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새로운 인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혁명적 인간’의 창조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살육하고 기존 제도를 파괴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프랑스 국민에게 마치 정복자처럼 무력을 행사했다. 억압된 개인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혁명의 목적이었지만 개인은 전체에 가려졌고, 자유는 공포에 떨었다.”

니스벳은 보수주의 신조(信條)로 간섭을 최소화하는 국가(최소 국가), 자유시장 경제, 가족·이웃·공동체 중시, 분권주의, 전통·경험 선호 등을 제시했다. “사적(私的) 자치를 존중하고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제도와 생활양식을 중시하는 태도야말로 보수주의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는 언제든지 개조가 가능한 기계가 아니다. 제도와 관습의 상호 관련성에서 보듯 유기적이다. 이런 점에서 한 국가의 진정한 법률과 헌법은 가치 지향적 이념으로 채워진 문서가 아니라 지난 수세기 동안 형성된 관습과 전통의 총체적 집합물이어야 한다. 이상론에 빠져 변화 자체를 목표로 삼아 무조건 급격한 변화를 숭배하는 맹목성을 경계하는 게 보수주의다.”

보수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를 좀 더 단순화하면 개인 역량이 발휘될 수 있는 자유시장 경제와 관습 및 전통 존중이다. 니스벳은 재산권 존중이야말로 보수주의 핵심 가치라고 주장했다. “보수주의자에게 재산이란 단순히 인간의 필요에 봉사하는 물질 이상이다. 신체의 연장이자 인간의 인간다움을 가능케 하는 필수조건이다. 재산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면 자유는 소멸되고 만다. 보수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들의 재산관(財産觀)을 시험하는 것이다.”

'혁신' 살아있는 게 진정한 보수

니스벳은 보수주의가 지켜지기 위해서는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분립’이 권력 집중을 막는 안전장치라는 것이다. “3권 분립이 유지되지 않으면 보수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는 지탱할 수 없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격언처럼 압제와 전제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

니스벳은 진정한 보수주의는 교조주의(敎條主義)와 설계주의에 빠져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보다 더 유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치인에게도 당리당략과 이념이 아니라 국익에 봉사할 것을 요구했다.

“보수주의에는 유익하지 않은 관행을 투쟁 대상으로 삼는 ‘혁신의 정신’이 있다.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 비스마르크의 실업보험 추진, 자유당을 포용한 처칠의 반(反)귀족 법안 수용, 드골의 알제리 독립 허용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자기 진영 내 반대를 무릅쓰고 담대하게 개혁에 나섰다. 진정한 정치인은 자기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에 유익한 것을 행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기를 잃더라도, 자극적이고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대중의 경박한 욕구에 영합하지 않는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