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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46] 신뢰와 칫솔

바람아님 2014. 1. 1. 16:23

(최재천-조선일보 2013.12.31. 최재천 국립생태원 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신뢰에 관해 서양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우스갯말이 있다. 

어린 딸과 함께 좁은 다리를 건너던 아빠가 은근히 겁이 나서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야, 물에 빠지지 않게 내 손을 꼭 잡으렴." 

그러자 딸은 "아니, 아빠가 제 손을 잡으세요"라고 말한다. 

의아해하는 아빠가 "무슨 차이가 있길래?" 하며 묻자 딸은 이렇게 답한다. 

"제가 아빠의 손을 잡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는 아마 아빠의 손을 놓아버리겠지만, 

아빠가 제 손을 잡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빠는 절대 제 손을 놓지 않을 테니까요." 

손은 절박한 쪽에서 먼저 잡는 법이다.


신뢰란 본래 서로 믿고 의지하는 상태를 뜻하지만 신뢰의 정도가 완벽하게 대칭인 경우는 거의 없다. "신뢰받을 짓을 했어야 신뢰하지"라고 말하지만 모든 인간관계에서 상대가 신뢰받을 짓을 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신뢰 관계란 내게 충분한 정보가 없더라도 스스로 판단하여 먼저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자연계에서 협력 관계가 진화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상황으로 여기는 '팃포탯(Tit―for―Tat)', 즉 맞대응 관계도 누군가의 '묻지 마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무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일단 한쪽에서 신뢰의 돌을 쌓기 시작하면 받는 쪽에서는 그 신뢰의 탑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 대학 시절 사흘이 멀다 하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던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허구한 날 학군단 훈련 때문에 나보다 일찍 나가는 녀석이 자꾸 내 칫솔로 이를 닦는 게 아닌가? 그래서 고민 끝에 기묘한 꾀를 냈다. 내 칫솔에 '손님용'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놓았다. 그랬더니 그 뒤로 내 칫솔은 늘 보송보송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다른 가족들의 칫솔이 돌아가며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둘 간의 신뢰가 무너지자 애꿎은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나는 신뢰란 당사자 둘만의 끈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에 걸쳐 있는 그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새해 갑오년에는 우리 함께 서로를 배려하는 촘촘한 신뢰의 망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