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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힐러리卿이 봤다는 그 기러기… 에베레스트 위를 난 비결

바람아님 2019. 10. 15. 18:05

(조선일보 2019.10.15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조류계 우주비행사' 흰줄기러기, 산소 희박한 9000m에서도 날아
美 여성 연구원, 직접 키워 훈련시킨 기러기 연구로 비결 알아내
어릴 적 꿈 우주인 된 그녀, 이제 우주에서 '극한 환경' 실험 나서


이영완 과학전문기자이영완 과학전문기자


"네 안엔 엄마의 용기가 흐른단다."

1996년 작(作) 할리우드 영화 '아름다운 비행(Fly Away Home)'은 13세 소녀가 모터 글라이더를 타고

기러기 16마리를 캐나다에서 미국까지 이주시키는 이야기를 그렸다.

소녀는 자신처럼 엄마를 잃은 기러기 알을 발견하고 어미 기러기를 대신해 키운다.

소녀는 기러기들이 자라자 야생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모터 글라이더를 타고 함께 날기로 했다.

도중에 아빠의 모터 글라이더가 추락하면서 소녀 혼자 기러기들을 이끌게 됐을 때,

아빠는 "너처럼 용감했고 꿈을 좇아 떠났던 엄마가 늘 네 곁에 있단다. 물론 기러기들 속에도"라며 용기를 줬다.

최근 한 여성 과학자가 영화에서처럼 기러기들의 엄마가 된 얘기가 화제가 됐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인 제시카 마이어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지난달 흰줄기러기가 산소가 부족한 고산지대를 비행할 수 있는 비결을 실험으로 밝힌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흰줄기러기는 인도에서 겨울을 나고 여름에 티베트와 카자흐스탄, 러시아로 이주한다.

도중에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만나지만 날갯짓을 쉬지 않는다. 1953년 뉴질랜드 산악인 힐러리 경이 인류 최초로

8848m의 지구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했을 때도 흰줄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고산지대는 산소가 부족하다. 해안가는 대기 중 산소 농도가 21%지만 에베레스트에선 7%로 떨어진다.

과학자들은 산소가 희박한 높은 산에서 어떻게 기러기가 날 수 있는지 연구를 했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

흰줄기러기는 허파가 크고 얇아 숨을 더 깊이 쉴 수 있고, 심장이 커 근육으로 산소를 담은 피를 더 많이 보낼 수 있다는

정도만 밝혀졌을 뿐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마이어 박사는 흰줄기러기가 실제로 날 때 몸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는 2010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미국의 한 조류공원에서 흰줄기러기 알

19개를 얻었다. 몇 주 후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들은 생전 처음 본 대상인 마이어 박사를 어미로 알고 따랐다.

마이어 박사는 기러기들이 자라자 영화에서처럼 스쿠터를 타고 달리며 비행 훈련을 시켰다.


최종 실험은 인공 바람이 불어오는 풍동(風洞) 실험장에서 진행됐다.

기러기들은 호흡 상태를 분석하는 특수 마스크를 쓰고 심장박동과 체온 등을 측정하는 배낭도 멨다.

실험에 참가한 기러기 7마리 중 6마리가 해발 5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맞춘 산소 농도에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심장박동과 날갯짓으로 비행했다. 3마리는 에베레스트산보다 높은 9000m 조건에서도 날 수 있었다.

마이어 박사는 산소가 희박한 조건에서 기러기들의 혈액 온도가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러면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이 산소를 더 많이 붙잡을 수 있다.

산소 농도가 희박해도 산소 흡수량이 늘어나 기러기들이 평소처럼 날 수 있었던 것이다.


흰줄기러기 연구는 단순히 호기심을 해결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극한 환경에 사는 동물은 일상에서 극한 조건에 처한 환자를 치료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마이어 박사는 기러기 연구 결과가 뇌졸중이나 심근경색으로 인체에 산소 공급이 힘들어진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는 2009년 UC샌디에이고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혹한의 남극 바닷속으로

잠수해 황제펭귄을 연구하기도 했다.


마이어 박사의 극한 연구는 이제 우주로까지 확장됐다.

그는 흰줄기러기를 연구하면서 동시에 어린 시절 꿈이던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해 NASA의 우주인 양성 프로그램에도

참가했다. 마침내 지난달 25일 마이어 박사는 러시아의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국제우주정거장으로 갔다.

그는 "펭귄과 바다표범, 기러기를 이어 내 자신이 극한 환경의 동물이 되겠다"고 밝혔다.

마이어 박사는 사람이 중력이 거의 없는 우주에 장기 체류하면 망막이나 동맥 등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의 연구는 특히 미국이 준비하고 있는 유인(有人) 달 탐사 프로젝트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흰줄기러기는 에베레스트를 넘는 비행 능력 덕분에 '조류계의 우주비행사'로 불린다.

마이어 박사가 키웠던 기러기들은 캐나다의 야생 조류 애호가에게 입양돼 이제 힘든 고산 비행은 안 해도 된다.

대신 '어미 기러기'인 마이어 박사가 진짜 우주비행사가 돼 우주로 날아갔다.

우주비행사와 기러기의 아름다운 비행이 저 먼 우주에서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