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전시·공연

자화상·누드…우리들의 얼굴로 읽는 시대정신

바람아님 2019. 12. 29. 09:35
[중앙선데이] 2019.12.28 00:02

갤러리현대 개관 50주년 기념 근현대인물화전

얼굴에는 시대정신이 스며있다. 우리가 초상화 혹은 인물화에 담긴 눈빛과 표정, 그리고 자태에서 그 시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이유는 “화면 안에 정지시킨 인간의 형상은 당대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지닌 채 시간과 공간을 넘었”(조은정 미술사학자)기 때문이다.
 

한국근현대 미술 대표화가
54명의 인물화 71점 골라

103년 전 한국 첫 누드화부터
민중미술까지 다양한 장르

2020년 개관 50주년을 맞는 갤러리현대가 선보인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18일~2020년 3월 1일)은 한국 근현대미술사 100년을 인물화로 풀어낸 독특한 전시다.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최열(서울대 강사)·목수현(서울대 강사)·조은정(고려대 초빙교수) 등 미술 전문가와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도쿄예술대학·삼성미술관 리움·뮤지엄 산·대구미술관·대전프랑스문화원과 개인 소장가 작품 중에서 추려낸 화가 54명의 작품 71점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산업화, 민주화라는 격변의 시기를 겪어낸 사람들의 체취가 그 속에 있다.
 
(왼쪽부터) 고희동의 ‘자화상’(1915), 도쿄예술대학 소장,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1934·부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천경자의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사진 갤러리현대]

(왼쪽부터) 고희동의 ‘자화상’(1915), 도쿄예술대학 소장,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1934·부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천경자의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사진 갤러리현대]

       
자화상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는 졸업생에게 자화상을 그리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조선인 최초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춘곡 고희동을 비롯해 43명의 자화상이 남아있는 이유다. 43점이 모두 공개된 것은 1989년 일본문화원에서 열린 전시 한 번뿐이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5명의 작품이 소개된다. 대한제국의 관료를 지냈던 춘곡은 이미 단발을 한 뒤였지만 정자관에 한복 두루마기 차림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점이 눈에 띈다.
 
누드 1916년 도쿄미술학교를 수석졸업한 김관호가 졸업작품으로 낸 ‘해질녘’은 그해 10월 ‘제10회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1546점이 출품돼 92점이 입선했고 이 중 특선에 뽑힌 11점 중 하나다. 유일한 조선인의 그림이자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서양식 누드화로, 당시 우리 사회에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유홍준 석좌교수는 “당시 매일신보는 ‘미술계의 알성급제’라고 흥분한 춘원 이광수의 관람기를 대서특필했다”며 “우리 근대미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해질녘’을 이번 전시의 서막으로 삼고 싶었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김관호의 ‘해질녘’(1916), 도쿄예술대학 소장(左), 박수근의 ‘길가에서’(1954), 개인 소장(右). [사진 갤러리현대]

김관호의 ‘해질녘’(1916), 도쿄예술대학 소장(左), 박수근의 ‘길가에서’(1954), 개인 소장(右). [사진 갤러리현대]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연속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이인성이 유화로 그린 ‘가을 어느 날’(1934)은 야수적 생명력이 돋보인다.  “누드와 조선 여인상이라는 양면을 조선적인 향토색으로 표현했다”는 것이 미술사학자 목수현의 평가다.
 
가족 박수근의 1954년작 ‘길가에서’는 전쟁이 끝난 어느 날, 갓난쟁이 동생을 처네에 두르고 누군가를, 아마도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아비나 어미를 기다리는 단발머리 어린 딸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박수근 특유의 마티에르 기법에 상대적으로 또렷한 윤곽선이 눈길을 끈다.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1954)은 소달구지에 아내와 두 아들을 태우고 어딘가로 희망의 발걸음을 옮기는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천경자의 섬세한 초기 화풍이 돋보이는 ‘목화밭에서’(1954)는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남자를 바라보는 젊은 엄마의 표정을 통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김인승의 ‘욕후의 화장’(1955), 개인 소장(左), 김환기의 ‘항아리와 여인들’(1951), 개인 소장(右). 천경자의 ‘탱고가 흐르는 황혼’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 모두 캔버스에 유채. [사진 갤러리현대]

김인승의 ‘욕후의 화장’(1955), 개인 소장(左), 김환기의 ‘항아리와 여인들’(1951), 개인 소장(右). 천경자의 ‘탱고가 흐르는 황혼’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 모두 캔버스에 유채.

[사진 갤러리현대]

       
여성 속옷 차림으로 립스틱을 바르고있는 여성을 그린 김인승의 ‘욕후의 화장’(1955)은 개인 소장품으로 그동안 잘 볼 수 없던 작품이다. 미술사학자 조은정은 “조용히 앉아 꽃 대신 다가오는 미인도가 아니라 1950년대 중반의 일상을 나타내는 표지적 의미의 존재”라고 설명한다. 강렬한 원색이 돋보이는 박생광의 ‘여인과 민속’(1981)은 일본 채색화 화풍을 전통 민속화와 불화 양식으로 승화시킨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민중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함께 본격화된 리얼리즘 미술운동은 민중미술이라는 장르가 됐다. 캔버스가 아닌 쌀 포대 위에 농민들의 삶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이종구 작가의 ‘아버지와 소’(2012)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풍경”(최열 미술평론가)이다. ‘비천’(1985)은 거친 새김질의 판화로 유명한 오윤의 보기 드문 유화 작품으로, 유홍준 석좌교수는 “모델이 ‘민주화 춤꾼’ 이애주”라고 귀띔한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성인 5000원. 매일 오후 3시 작품 설명이 진행된다. 특별 강연(1월 10일, 1월 31일, 2월 14일·오후 2시)은 선착순 80명을 대상으로 열린다. 



[추가게시]


김관호, "해질녘 1916 캔버스에 유채" 127.5 x 127.5 cm 도쿄예술대학


이인성, "가을 어느 날 1934 캔버스에 유채" 96 x 161.4 cm 삼성미술관 리움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34 종이에 유채" 29.5 x 64.5 cm


박수근, "모자 1961 캔버스에 유채" 45.5 x 38 cm


배운성, "가족도 1930-35 캔버스에 유채" 139 x 200.5 cm 대전프랑스문화원


천경자, "탱고가 흐르는 황혼" 1978 종이에 채색 46.5 x 42.5 cm


김명희, "김치 담그는 날 2000 칠판에 오일파스텔", LCD 모니터 120 x 240 cm




[KBS 화면 추가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