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그림, 詩에 빠지다]유배지서 보내온 편지휘영청 달 밝은 밤-소식 적벽부

바람아님 2014. 2. 22. 22:29
적벽부 (赤壁賦)
임술년 가을, 7월 16일. 소식이 손님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적벽 아래를 노닐었다. 맑은 바람은 나직이 불고 물결은 잔잔하니 술을 손님에게 권하며 명월의 시를 암송하고 요조의 장을 노래한다. 달이 동산 위에 떠올라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서성이자 흰이슬이 강물에 끼고 물빛은 하늘에 닿았다. 한 잎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두고 일만 이랑 망망한 곳으로 나아가니 넓어서 허공을 타고 바람을 탄 것 같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정처 없이 세상을 잊고 홀로 날개가 생겨 신선이 되어 오르는 것 같다. 이때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 뱃바닥을 두드리며 노래하길 ‘계수나무 삿대와 목란나무 돛대는 맑은 물을 치고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올라라. 내 마음은 아득히 저쪽 하늘에서 아름다운 그대를 바라보리라.’손님 가운데 피리를 부는 이가 있어 노래를 따라 가락을 맞추니 그 소리가 원망하는 듯, 그리워하는 듯, 흐느끼는 듯, 호소하는 듯 남은 음이 실처럼 가늘게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잠긴 용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의 홀어미를 울린다.

소식 (蘇軾)
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泛舟遊於赤壁之下,淸風徐來,水波不興,擧酒屬客,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少焉,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白露橫江,水光接天,縱一葦之所如,凌萬頃之茫然, 浩浩乎,如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飄飄乎,如遺世獨立,羽化而登仙,於是飮酒樂甚,扣舷而歌之,歌曰,桂棹兮蘭槳,擊空明兮泝流光,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客有吹洞簫者,倚歌而和之,其聲鳴鳴然,如怨如慕, 如泣如訴,餘音嫋嫋,不絶如縷,舞幽壑之潛蛟,泣孤舟之婦
▲ 안견 ‘적벽부도’ 비단에 연한 색, 161.3×102.3㎝, 국립중앙박물관

추석이다. 모두들 평화로웠던 고향을 떠올리는 시간이다. 세상이 온통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로 보였던 그 옛날. 기억 속의 고향은 땟국물 줄줄 흐르는 옷을 입고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 누워도 인생이 지금보다 훨씬 풍요롭고 넉넉했다. 눈을 감으면 금세라도 어머니가 사립문을 밀치고 나와 멀리서 온 나를 반겨줄 것 같은데 이제는 더 이상 그 집도 어머니도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고향집에 피붙이가 살고 있다 한들 옛날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직장 때문에 혹은 몸에 병이 들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경제적 형편 때문에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귀향하는 사람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배지나 다름없는 타향에서 오로지 마음속의 고향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인 소식이 위로의 시를 건넸다.
   
   
   유배지에서 찾은 자연과의 합일
   
   소식(蘇軾·1037~1101)이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것은 유배지에서였다. 북송 때의 시인인 소식은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여서 흔히 소동파(蘇東坡)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다방면에 능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데 왕안석(王安石·1021~1086)의 개혁안에 반대하다 투옥된 후 호북성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그의 나이 40대 중반의 일이었다. 유배지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음도 달랠 겸 해서 친구들과 함께 7월 16일에 적벽을 찾아 뱃놀이를 한 후 ‘적벽부’를 지었다. ‘적벽’은 조조(曹操)와 주유(周瑜)가 ‘적벽대전’을 치른 곳으로 유명한 장소인데 소식은 이곳을 주유(舟遊)하며 영웅들의 과거 모습을 회상하면서 인생무상을 노래한다. 그는 3개월 뒤인 10월에 다시 한 번 적벽을 찾아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는데 이번주에 소개한 시는 ‘전적벽부(前赤壁賦)’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소식은 조선 문사들이 존경하는 시인이었으며 안견(安堅)·정선(鄭敾)·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한 화가가 이 소식의 ‘적벽부’를 소재로 붓을 들었다. 안견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적벽부도’ 역시 그런 조선 선비들의 소식에 대한 흠모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 작가 안견은 ‘적벽부도’에서 화면의 대부분을 거대한 자연을 그려내는 데 할애하고 소식 일행이 탄 배는 화면 하단에 작게 묘사했다. 웅장한 자연 앞에 선 배는 그야말로 ‘일엽편주(一葉片舟)’가 따로 없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하루살이같은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은 작게 그린 반면 화면은 온통 산과 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배의 오른쪽에는 흔히 ‘동파건(東坡巾)’이라 불리는 검은 관을 쓴 소식이 앉아 있고,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그날 밤의 유람에 참여한 친구들이 앉아 있다. 뒤로는 열심히 술을 따르는 동자와 노를 젓는 사공이 보인다. 그들은 한창 술을 마시며 뱃전을 두드리고 대화를 하면서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중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도 때가 되면 먼지처럼 사라진다.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한 사람이 쓸쓸한 목소리로 탄식하자 또 한 사람이 술잔을 들고 말을 받는다. ‘변하지 않는 데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거늘 무엇을 부러워하리오.’ 그렇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취흥이 올라 서로를 베개 삼아 배 안에 누우니 동녘이 밝아오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유배하지 않았다면 적벽부도 없었다
   
   유배를 당한 것은 소식에게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만약 소식에게 유배라는 소외와 격절이 없었다면 ‘적벽부’ 같은 명문장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의 곁에서 신임받으며 잘나가는 관직에 앉아있었더라면 바쁜 와중에 적벽으로의 유람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적벽부’는 유배라는 ‘강제 휴가’ 덕분에 지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불행하다고 느낀 사건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축복이었음을 아는 경우가 어찌 소식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문제였겠는가. 우리도 때론 다니던 직장에서 강제로 밀려나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실직 상태에 놓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소식처럼 적벽 유람을 계획할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유배지 같은 삶 속에 빠져 있다 해서 웅크리고만 있지 말고 가볍게 일어나 동네라도 한 바퀴 둘러볼 일이다. 아니면 큰 맘 먹고 가까운 산에라도 올라가면 어떨까. 김밥과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도 배낭에 넣어 산에 가서 식후 커피라도 타서 마시면 이 또한 색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어느 곳으로도 떠나지 못하고 외롭게 명절을 보내는 내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지거든 산 중턱에 서 있는 나무를 보자. 그 나무는 100여년 세월을 한곳에 뿌리박은 채 한 번도 움직이지 못하고 생로병사를 되풀이하는 생명체를 지켜봐야 했다. 다리가 붙들린 삶이 나보다 더 고독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답답하다고 비명 한번 지르지 않은 채 한 세월을 묵묵히 살고 있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그곳에 터전을 삼고 짐을 풀면 새로운 인연이 생기는 법이다. 나무가 움직이지 않아도 새들이 날아오고 바람이 불고 철 따라 뿌리 곁에서 버섯이 피었다가 진다. 그런 나무를 바라보면서 소식 같은 글이라도 기록해 보자. 이번 추석에는 비록 편안한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호사는 누리지 못하더라도 그저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보내야겠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