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山行)
두목 (杜牧)
멀리 늦가을 산에 오르니 돌길 비껴 있고 (遠上寒山石徑斜)
흰 구름 이는 곳에 몇 채의 인가 (白雲生處有人家)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은 단풍을 구경하나니 (停車坐愛楓林晩)
서리 맞은 단풍잎 이월의 꽃보다 더 붉네 (霜葉紅於二月花)
▲ 풍림정거 안중식, 비단에 색, 29.5 x 29.4㎝, 간송미술관 |
가을만큼 짧은 계절이 있을까. 여름이 끝났는가 싶으면 어느새 늦가을이다. 이러다 가을을 느끼기도 전에 겨울이 오겠다 싶어 무작정 배낭을 메고 집을 나왔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가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한적한 산이 있다. 그곳으로 향했다. 집에서 가까운 뒷산을 놔두고 굳이 멀리 있는 산까지 찾아간 이유는 그곳의 단풍이 심산유곡의 단풍 못지않게 짙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한참을 간 후 버스에서 내리니 산 입구에 퇴락한 듯 쓸쓸한 슬레이트집 한 채가 있다. 지난 봄에 왔을 때 마당에서 손주와 놀고 있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빈집처럼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마룻가에 놓인 늙은 호박 두 덩어리만이 폐가가 아님을 말해준다. 세월의 풍상을 견디지 못해 허물어진 담장은 담쟁이가 억지로 붙잡고 있는 듯 겨우겨우 서 있다. 한때 이 집에서도 싱싱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겠지. 아련한 애상에 잠겨 산길에 접어들었다. 길인 듯 아닌 듯 험한 돌투성이 길을 따라 정상까지 가는 길에는 세상의 소음과 완전히 차단된 침묵의 세계가 펼쳐진다. 오로지 나 혼자뿐이라는 외로움에 잠겨 쓸쓸히 발길을 옮기는데 눈앞의 세계는 온통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 천지다. 인생의 가을에 들어선 사람이 보는 단풍은 그저 감상하기 좋은 배경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철학적 풍경이다.
사람의 인생도 가을과 다르지 않다
‘풍림정거(楓林停車)’는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803~852)의 시 ‘산행(山行)’을 화제로 삼아 안중식(安中植·1861~1919)이 그린 작품이다. ‘단풍나무 밑에서 수레를 멈춘다’는 뜻의 ‘풍림정거’는 두목의 시 세 번째 행에서 그 뜻을 취했다. 안중식은 이 작은 그림에서 두목의 시를 재현하듯 충실하게 그렸다. 지그재그로 배치된 돌길을 따라 선비가 올라온 길이 보이고 뒤편으로는 흰구름 아래 집이 서 있다. 선비는 서리 맞은 단풍나무 아래서 고개를 들어 건너편 단풍을 쳐다보고 있다. 두 명의 시동(侍童)도 단풍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수레를 밀고 오느라 지칠 법도 하련만 시동들은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단풍구경에 빠져 있다. 젊음이 좋은 건가. 아니면 피곤함을 잊게 할 정도로 단풍이 아름다운 건가.
안중식의 ‘풍림정거’는 삼성리움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이 한 점 더 있는데 여기서 소개하는 작품보다 훨씬 크고 웅장해서 보는 사람의 눈을 압도할 정도다. 그러나 늦가을의 쓸쓸한 정취를 느끼기에는 작은 이 그림이 더 좋다. 특히 절반쯤 져버린 볼품없는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선비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무심한 듯 단풍잎을 쳐다보는 선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고등학교 때 배웠던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울음 우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하는 이 글의 다음 구절은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울음 우는 아이’의 슬픔만이 슬픔인 줄 알았다. 작은 새의 시체 위에 가을빛이 떨어져 있을 때 가을이 우리를 ‘대체로’ 슬프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울음 우는 아이보다 더 슬픈 것이 죽음 위에 비추는 햇볕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대체로’가 아니라 ‘반드시’ 슬프게 한다는 것을. 어쩌면 선비는 연로한 할아버지들이 멋진 풍경을 볼 때 입버릇처럼 하던 말씀을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내년에도 저 경치를 볼 수 있을 것인가.’
두목의 ‘산행’은 조선 후기 화가들이 즐겨 그린 화제(畵題)였다. 안중식뿐만 아니라 정선(鄭敾·1676~1759), 이인상(李麟祥·1710~1760), 정수영(鄭遂榮·1743~1831)이 모두 ‘산행’을 소재로 그림을 남겼다. 모르긴 해도 그들 또한 인생의 말년에 붓을 들었을 것이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붓을 들 수 있겠는가.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낙엽이 꽃이라면,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엘리엇 부의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중에서) 카뮈의 글을 읽는 순간, 작가는 동서양이 따로 없이 생각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두목이 단풍을 봄꽃에 비유함으로써 그 진한 단풍색을 선명하게 떠오르도록 했다면 까뮈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가을을 봄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첫 번째 봄이 아니라 두 번째 봄이다. 서툴고 막막함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꽃을 피워내야 하는 첫 번째 봄이 아니라 경험이 있어 한결 느긋하고 여유로운 두 번째 봄이다. 인생의 가을을 보내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을은 결실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결실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봄에서 여름을 지나 가을에 결실을 맺기까지 기막힌 사건을 겪어야 한다. 꽃샘추위부터 시작해서 늦여름, 초가을의 태풍까지 견뎌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봄에 핀 꽃은 아름답지만 처음 세상을 향해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만큼 꽃송이마다 두려움이 숨어 있다. 비록 지금 꽃은 피우지만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힐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온전히 제 생을 다 살아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불안감. 그것은 마치 의욕은 넘치나 갈피를 잡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이십대의 젊음과 같다. 그러나 가을은 다르다. 가을 단풍잎은 비록 봄에 피는 꽃같이 부드럽고 고운 꽃잎은 아니지만 여러 계절을 견디면서 축적된 시간이 들어 있다. 퍼석하고 윤기 없는 잎을 지녔지만 가을의 봄꽃은 여러 계절을 보내면서 배운 지혜로 물든 색이다. 바닥에 떨어져 썩는다 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름이 되어 새 생명으로 환생한다는 것을 아는 꽃이다.
‘풍림정거’에서 단풍나무처럼 앉아 있는 선비는 꽃과 같은 사람이다. 두목은 시(詩)를 잘 지어 이상은(李商隱)과 함께 ‘소이두(小李杜·작은 이백, 두보)’라는 칭송을 받았다. 가을 낙엽을 봄꽃에 비유함으로써 나이 드는 것의 가치를 일깨워준 시인도 꽃과 같은 사람이다. 시는 쓰는 것보다 시처럼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행여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어 쓸쓸하다고 느낀다면 그림 속 선비처럼 살 일이다. 우리의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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