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수 (歐陽脩)
구양자가 밤에 책을 읽고 있는데 (歐陽子方夜讀書)
서남쪽으로부터 어떤 소리가 들려 (聞有聲自西南來者)
섬뜩 놀라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하였다 (悚然而聽之曰)
“이상도 하구나! (異哉)”
처음에는 빗소리에 바람 소리 같더니 (初淅瀝以蕭颯)
느닷없이 물결이 솟구쳐 올라 부딪치는 소리 같다가 (忽奔騰而澎湃)
마치 파도가 밤중에 놀라고 비바람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듯하고 (如波濤夜警風雨驟至)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거리며 쇠붙이가 울리는 듯하며(其觸於物也鏦鏦錚錚 金鐵皆鳴)
마치 적지에 다다른 병사들이 재갈을 물고 내달리듯 (又如赴敵之兵 銜枚疾走)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不聞號令)
다만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것 같도다 (但聞人馬之行聲)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予謂童子)
“이것이 무슨 소리냐? 네가 나가서 살펴보거라 (此何聲也 汝出視之)”
동자가 말하였다 (童子曰)
“별과 달은 환히 빛나고 (星月皎潔)
은하수는 하늘에 걸렸는데 (明河在天)
사방에 사람 소리는 없고 (四無人聲)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납니다 (聲在樹間)”
나는 말하였다 (予曰)
“아아! 슬프도다 ! (噫嘻悲哉)
이것이 가을의 소리구나 (此秋聲也)”
▲ 성재수간 안중식, 종이에 연한 색, 24x36cm, 개인 |
찬란한 가을이 스러졌다. 장엄한 계절이 조락했다. 천지를 불태웠던 가을이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본 선비의 심사가 못내 쓸쓸하다. 사람의 가을도 그와 같지 않겠는가. 선비는 밤이 깊어도 쉽게 잠들지 못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책을 붙잡고 있자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빗소리 같더니 파도 소리 같고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같더니 말 달리는 소리 같았다. 졸고 있는 아이를 깨워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라 일렀다. 눈을 비비고 나가 두리번거리던 아이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무도 없는데요. 나뭇가지에서 나는 소리라면 모를까.”
가을 소리는 어디에서 들려올까
늦가을의 쓸쓸함을 탄식하다 ‘추성부(秋聲賦)’라는 절작(絶作)을 만든 시인은 구양수(歐陽脩·1007~1072)다. 그는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지난번에 감상한 ‘매미 울음 소리에 붙이는 글(鳴蟬賦)’을 지은 사람이다.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성재수간(聲在樹間)’은 바로 이 아이의 대답을 화제로 그렸다. 지금 아이는 마당에 서서 이 밤중에 행여 누가 찾아오지는 않았을까 확인하는 중이다. 사립문 곁을 봐도 하늘의 별과 달과 은하수를 봐도 소리의 정체는 찾을 수 없다. 안중식은 그림 제목을 눈에 띄지 않게 마루 벽면에 슬쩍 써 넣음으로써, 찾을 수는 없는데 계속해서 들리는 소리를 암시하고 있다. 아이는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찾기 위해 귀를 기울이며 사방을 둘러본다. 원인을 찾지 못한 아이의 옷자락이 바람에 심하게 휘날린다. 졸던 아이를 깨워 밖으로 내보낸 구양수는 방문에 그림자로만 비쳐졌다. 가느다란 선으로 분명하게 그린 아이와, 연한 먹이 번지듯 흐릿하게 그려진 구양수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아이는 일이 끝나면 방에 들어가 곤한 잠을 자겠지만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여 책을 읽을 수 없는 선비는 그 실체가 확인될 때까지 뒤척일 것이다.
‘추성부’는 조선의 많은 선비들과 화가의 사랑을 받았다. ‘추성부’를 화제로 삼은 그림은 여러 점이 전한다. 그중에서도 김홍도의 ‘추성부도’는 안중식의 작품보다 더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김홍도는 흐르는 바람 소리에 늦가을의 선득함을 담아 종이를 적셨다. 그의 작품에서는 구양수의 글보다 더 쓸쓸한 계절의 냉기가 전해진다. 감상자는 김홍도의 그림 앞에 서는 순간 가슴속에서 덜커덩, 하고 무너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허둥지둥 살아온 시간을 정리하지 못한 채 맞닥뜨린 가을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여간해선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다. 담담할 수가 없다. 감상자는 이런저런 심사가 뒤섞여 혼란스럽다. 그림은 짐짓 모른 체 시치미를 뗀다. 심하게 부는 바람을 그렸으면서도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천둥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적요롭다. 그 명징한 적요 앞에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 내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감추기는 힘들다.
이것이 내가 김홍도의 명작 대신 안중식의 ‘성재수간’을 취한 변이다. 담담하기에는 이른 나이 때문일 것이다. 아니라면 이 나이 되어서도 여태껏 흔들리며 사느냐고 너무 많은 나이를 탓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안중식의 ‘성재수간’은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다 덜 부담스럽다. 그림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휙휙 불고 있어 적당히 묻혀 가면 감상자의 누추한 마음쯤이야 들킬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을의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구양수의 ‘추성부’는 가을의 소리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소리가 어찌하여 왔는지 어떤 모습으로 왔는지 그리고 왜 왔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밤이 깊어 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침내 구양수는 ‘만물이 성할 때를 지나면 마땅히 죽게 되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인생의 무상함에 절로 탄식한다. 주인의 수심이 깊거나 말거나 동자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오직 사방 벽에서 찍찍거리는 벌레 소리만이 구양수의 탄식 소리를 더해주는 듯하다.
‘추성부’는 늦가을에 버석거리는 바람 소리를 통해 삶의 유한성이라는 진리에 이르는 철학적인 글이다. 가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찾아온다. 구양수에게도 아이에게도 똑같은 무게로 찾아왔다. 그러나 가을을 맞이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해답은 달라진다. 아직 인생이 봄인 아이에게는 가을이 와도 건성으로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인생이 겨울에 가까운 사람에게 가을은 그 느낌이 예사롭지가 않다. 행여 이 가을이 내 인생의 마지막 가을이 아닐까. 겁부터 덜컥 난다. 그렇게 사람은 여러 차례의 가을을 보내면서 잠이 없어지고 고민은 깊어간다. 이래저래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사람에게 밤은 길고 수심은 깊다. 긴 밤과 깊은 수심을 보낸 후에 맞이한 아침이야말로 진심으로 귀하고 소중한 날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나이 들어갈수록 더욱 더 진지해지고 겸손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세월이 가르쳐 준 지혜로움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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