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杜甫)
옥 같은 이슬이 단풍나무 숲을 시들게 하고 (玉露凋傷楓樹林)
무산과 무협에 감도는 기운은 쓸쓸하다 (巫山巫峽氣蕭森)
강의 물결은 하늘로 솟구치고 (江間波浪兼天湧)
변방의 바람과 구름은 땅을 덮어 어둡다 (塞上風雲接地陰)
두 번 핀 국화 보니 눈물겹고 (叢菊兩開他日淚)
외로운 배는 고향 생각나게 하네 (孤舟一繫故園心)
겨울옷을 마련하려 사방에서 가위와 자를 준비하고 (寒衣處處催刀尺)
높은 백제성에는 해질녘 다듬이 소리 급히 울리네 (白帝城高急暮砧)
▲ 추흥팔수(秋興八首) 작자미상, 모시에 연한 색, 27×30.7㎝, 선문대박물관 |
시성(詩聖) 두보(杜甫·712~770)가 ‘가을의 감흥 여덟 수(추흥팔수·秋興八首)’를 지은 곳은 쿠이저우(夔州)였다. 쿠이저우는 장강(長江) 중류에 있는 쓰촨성과 후베이성의 경계에 있는 협곡 마을이다. 충칭(重慶)시에 속한다. 장강의 거친 물살이 흰 거품을 내며 협곡의 절벽 사이를 흐르는 곳이다.
55세가 된 두보가 쓰촨성 청두(成都)에서 쿠이저우로 온 것은 그를 돕던 벗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제 의지할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 그는 기나긴 유랑생활로 생활은 궁핍했고 가난에 전 몸과 마음도 모두 병들었다. 언제 관직생활을 했는지 가벼운 벼슬살이의 기억마저 흐릿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통과 외로움이 세차게 밀려들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쿠이저우에서 400여수의 시를 남겼다. ‘추흥팔수’도 그중의 하나다.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작자 미상의 ‘추흥팔수’는 두보의 시 ‘추흥팔수’를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시와 그림이 합본된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 중에 들어 있다. 화첩의 오른쪽에는 그림 한 점이 펼쳐져 있고 왼쪽에는 두보의 시 ‘추흥팔수’가 모두 적혀 있다. 한 화면에 전부 다른 내용이 담긴 8편의 시를 동시에 그려 넣을 수는 없는 법.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추흥팔수’ 중 첫 번째 시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옥 같은 이슬이 내리자 단풍나무숲은 제 빛을 잃고 잿빛으로 변했다. 색이 빠져 나간 숲은 쓸쓸하고 황량하다. 허전한 숲 사이로 찬바람이 인다. 바람이 세차니 장강의 물결이 포효하듯 하늘로 솟구친다. 오랜 세월 객지를 떠돌며 가난과 병에 시달린 두보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두 번째 가을을 맞이했다. 이슬을 맞고서도 시들지 않은 국화를 보자 고향 생각에 와락 눈물이 쏟아진다. 강가에 서 있는 빈 배를 보고 있자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다.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만들며 겨울 채비를 서두르는데 나그네는 올해도 고향에 갈 수 없는 걸까. 향수에 젖은 두보의 가슴이 그리움과 회한으로 먹먹하다.
두보의 시에 비해 그림은 매우 건조하다. 시에서 우수와 애절함을 제거해 버리고 오직 ‘팩트(fact)’만을 보여주겠다는 듯 그림을 풀어내는 손길이 자못 쌀쌀맞다. 그나마 마른 붓질을 여러 차례 그린 산과 바위의 피마준법(披麻皴法)이 가을의 쓸쓸함을 드러내주는 것이 다행이다. 감상에 빠지는 것에 무관심한 것 빼고는 작가는 시의 내용에 충실하다. 화면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는 가운데 두 인물이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이슬 맞은 나무를 가리킨다. 옆사람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다. 동양화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을 그릴 때 주로 배치하는 인물 구도법이다. 여러 종류의 나무를 함께 그리는 것은 남종화법에서 습관적으로 그리는 수법이다. 왼쪽 하단에는 외로운 배도 그렸고 오른쪽 상단에는 우람한 백제성도 그렸다.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소재는 전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을의 흥취’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시들어 퍼석거리는 단풍을 발견한 시인의 쓸쓸함, 국화꽃과 빈 배에 담긴 향수와 고적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등이 이 그림에는 없다. 있을 것은 다 있는데 여전히 부재감이 느껴지는 아쉬움. 대상 너머의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라고 말하려는 걸까.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욱 쓸쓸해진다.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을 때처럼.
두보가 자식들에게 재산 대신 물려준 것
두보는 이백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이, 두’라고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백과 두보는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로의 시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두 사람의 시의 세계는 전혀 달랐다. 이백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유분방한 시를 펼쳐냈다면 두보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시에 담았다. 특히 안사의 난(安史之亂·755~763)을 겪으면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상을 훌륭하게 시로 승화시켜 ‘시의 역사(詩史)’라 불린다.
9년 동안 지속된 안사의 난으로 중국의 인구가 3600만명이 줄어들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전쟁은 비참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두보는 시를 썼다. 자신과 백성들의 이야기를 시로 썼다. 결혼식 다음 날 남편을 수비대로 보내야 하는 신부의 비통함, 자손들을 모조리 잃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강제징집에 맞서 한겨울의 싸늘한 길바닥에 드러누워 우는 비극, 처량한 달빛이 백골을 비추는 격전지의 밤, 전쟁에서 패한 병사가 찾아간 텅 빈 고향 등등, 이 모든 상황이 두보의 시로 승화되었다.
양귀비와 현종이 화청지(華淸池)의 온천탕에서 환락에 빠져 있던 날, 그의 아들이 굶어 죽었다는 개인사도 시 속에 기록했다. 남겨진 가족들은 누더기를 걸친 채 유랑하며 겨우 목숨만 연명했다. 잠깐 동안 미관말직에 근무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두보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빈곤했다. 그는 쉰아홉의 나이에 거친 바람이 윙윙대는 강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살아 있을 때 그의 시는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위대성을 알려준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년이 지난 뒤에야 등장했다. 한유·백거이 등의 눈 밝은 시인들이 두보를 발견했고, 소식·황정견 등이 그 뒤를 따랐다. 두보에 대한 존경은 중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때 두보의 인기는 이백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그 비결을 역사가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심과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을 시 속에 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보의 시를 두고 어떻게 이렇게 건조한 보고서 같은 평가를 내린단 말인가. 그보다는 사람살이에 대한 본원적 성찰이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두보는 시에 관한 한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한 가난이야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신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궁핍한 시인은 자식들에게 아무런 재산도 물려주지 못했다. 물려주기는커녕 스스로의 가난도 해결하지 못해 굶주리는 날들이 많았다. 대신 1400여수의 시를 남겼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이 무조건 돈과 부동산만이 아니라는 것을 두보의 시는 말해준다. 이름 없는 촌부로 살더라도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포용하고 긍정하는 사람의 삶이라면 두보처럼 위대하다는 교훈을 들려준다. 시성(詩聖)의 가르침은 죽어서도 여전하다.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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