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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77] 하와이 병합 '사죄 결의'

바람아님 2014. 4. 3. 17:43

(출처-조선일보  2012.08.22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과거에 식민 지배를 했던 측이 피지배 시민에게 사죄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전혀 없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의 '하와이 병합 사죄 결의'가 그런 사례이다. 하와이왕국이 불법으로 미국에 병합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인 1993년 의회는 '1893년 1월 17일 하와이왕국 병합 백 주년 기념일을 승인하는 한편 병합에 관해 미국을 대신하여 하와이 원주민에게 사죄하는 결의'를 가결했다. 이 결의는 상하 양원을 통과한 후 그해 11월 23일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하여 법률로 공포되었다.

폴리네시아계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하와이제도에 도착한 것은 서기 200년경으로 짐작된다. 이 사람들은 타로토란 재배와 어업으로 비교적 풍족하게 생활해 갔다. 그러다가 1778년에 유럽인이 처음 도래하여 이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810년 카메하메하 1세가 군도를 통일하여 하와이왕국이 수립되었을 때 미국은 이 나라의 독립을 승인하고 통상조약을 비롯한 몇 개의 조약을 맺어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여기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백인들이 들어와 광대한 땅을 사유화하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든 이후의 일이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백인 농장주들이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다. 1892년 하와이 최초의 여왕인 릴리우오칼라니가 즉위한 후 백인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백인 농장주들의 반발을 가져와 이들이 '병합 클럽'을 만들어 하와이를 미국에 병합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이에 호응하여 미국은 해병대를 보내 압박을 가하여 보호조약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병합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조사단을 파견하여 그동안 해병대가 했던 일은 불법적인 전쟁 행위라고 판단했고 상원도 보호조약 비준을 거부했다. 하와이 주민도 병합에 반대하는 청원서를 워싱턴에 보냈다. 

그러나 1898년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모든 것을 뒤집어놓았다. 아시아와 미국 본토의 중간에 있는 하와이를 병합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상원 의원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한 조약 비준 방식이 힘들어 보이자 의회 결의라는 간략한 형식으로 병합을 밀어붙였다.

1993년 사죄 결의는 '미 합중국이 관리와 시민이 관여해 1893년 1월 17일에 하와이왕국을 무너뜨리고 하와이 원주민의 자결권을 박탈했던 일에 사죄'했다. 늦게나마 지난날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보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소인배 국가와는 다른 대국의 면모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