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24. 1. 2. 03:10 수정 2024. 1. 2. 03:30
한복 속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
권력 누린다는 원성 살까 봐 늘 조심
조용히 봉사 선행, 온 국민 존경받아
육 여사 같은 영부인 또 볼 수 있을까
1968년 7월 3일 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물난리가 났다. 잠원동 주민 300여 명이 신동초등학교에 긴급 대피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폭우 속에 황토물 교정을 철벅철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 밤중에 누굴까?” 그는 교사 안으로 들어오며 머리를 감쌌던 흠뻑 젖은 수건을 벗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사님 아냐?”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육영수 여사는 “여러분 얼마나 고생 많으세요”라고 인사한 뒤 가져온 구호 물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나룻배를 타고,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길을 고무신 차림으로 걸어서 그곳까지 온 것이다.
그해 호남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 현장을 찾은 육 여사는 논두렁길로 걸어갔다. 말라 타버린 논 구석에 양수기가 있었다. 올라서서 양수기를 밟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뒤덮인 빈 양수기가 쩍쩍 소리를 냈다. 그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다가갔다. 육 여사는 울먹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사람들을 어떡하지….”
육 여사는 소리소문 없이 봉사와 선행에 힘썼다. 보육원, 양로원 등 사회의 그늘진 곳을 보살폈다. 67년 말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정부·여당 송년회에 육 여사가 불참했다. 의아해하는 참석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집사람은 보육원에 가느라 못 왔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모두 아무 말을 못 했다.
육 여사는 검소했다. 이애주 전 의원의 증언. 육 여사가 흉탄에 스러진 74년 8월 15일 서울대병원 간호사였다. “서거하신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글쎄 한복 속옷을 기워 입으셨더라고요. 알뜰하고 소박한 성품을 생각하며 유품 앞에서 다시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남들이 화려한 자리라고 부러워하는 대통령 부인이지만, “청와대는 항상 중류 살림을 하자”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비싼 옷을 입는 일이 없었다. 청와대에는 그 흔한 꽃꽂이도 못 하게 했다......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사치 행각을 벌였다. 명품 구두만 3000켤레가 넘었다. 육 여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의 부인이었지만.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다. 국가의 대소사와 인사는 대통령의 영역이라 판단해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박 대통령에게 저항하던 사람들도 육 여사의 인품에는 고개를 숙였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육 여사 영결식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심은 평화와 사랑의 씨가 자라 그 꽃을 피우게 해 달라.” 김 추기경은 훗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국모(國母)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분”이라고 썼다.
그 뒤 대통령 부인이 여럿 나왔다......하지만 육 여사만큼 온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품격 있게 대통령 부인 역할을 잘 해낸 인물은 없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육 여사가 생각나는 2024년 새해 아침이다.
https://v.daum.net/v/20240102031003522
[고현곤 칼럼] 육영수 여사가 생각나는 새해 아침
[고현곤 칼럼] 육영수 여사가 생각나는 새해 아침
1968년 7월 3일 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물난리가 났다. 잠원동 주민 300여 명이 신동초등학교에 긴급 대피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폭우 속에 황토물 교정을 철벅철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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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주고 위로를 주겠다고 그렇게도 마음속으로 단단히 생각했던 나의 계획은 엉뚱하게도 그들을 대하는 순간, 검은 눈동자와 황색 피부의 낯익은 우리 젊은이들의 환성 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프도록 가슴이 맺혀 오는 무엇인가 뭉클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시야가 뽀얗게 흐려지는 것이었다" -육영수 여사 방독기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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