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4. 4. 6. 02: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8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 바로 그 현장에서 폭풍(爆風)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3인의 미국인 종군기자들이 있었다. 당시 국군은 인도교 남쪽 제2, 제3 상판을 폭파했고, 이 3인의 종군기자들은 발파 지점에서 불과 25야드(23미터) 떨어진 제1 상판 위에서 지프를 타고 있었다. 그날 아침 천신만고 끝이 한강을 건넌 수원까지 간 3인은 “한강 다리 폭파” 관련 특종 기사를 쏟아냈다.
“슬픈 중국”에서는 지난 <26회>와 <27회> 두 차례에 걸쳐서 이 3인의 종군기자가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이미 언급했듯, 이들이 쓴 기사들은 생존자들의 목격담이면서, 동시에 직업적으로 훈련된 베테랑 종군기자들이 육하원칙에 맞게 작성한 현장 보고서다. “한강 다리 폭파 사건”과 관련하여 이들의 기록보다 더 중요한 1차 사료는 없다. 예컨대 1950년 9월에 열린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로 인한 아군 피해의 책임자 처벌을 위한 재판”의 판결문이나 1982년 출판된 이창록의 회고록 “전환기의 내막” 등 역시 중요한 사료이지만, 바로 당일 그 시각 폭파 현장에 있었던 종군기자들이 당일 작성한 특종 기사들에 비하면 정확성, 세밀성, 현장성이 떨어진다.
이제 한강 인도교 폭파의 ‘신화’를 넘어서 ‘역사’를 찾을 때가 되었다. 그 첫걸음은 지금껏 3회에 걸쳐 소개한 3인 종군기자의 기록을 면밀하게 샅샅이 분석하는 일이다. 폭파 순간 발파 지점 지척에 있다가 폭풍(暴風)을 맞은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당시 상황을 세상에 알린 종군기자 3인의 기록이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중요하고도 신빙성이 큰 목격자들의 직접 증언이다. 반면 이미 수원의 임시 사령부로 후퇴한 하우스만의 주장은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불확실한 사망자 최대치의 추정일 뿐이다.
https://v.daum.net/v/20240406020014921
美 종군기자 3인이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 (3)[송재윤의 슬픈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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