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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팔굽혀펴기' 열다섯 번이면 다 해결된다!

바람아님 2015. 1. 30. 10:45

(출처-조선일보 2013.11.22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김정운)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사진
일찌감치 고령화사회 진입한 일본, 孤獨을 당연하게 여겨
외로우면 안되는 '고독저항사회' 한국, 경조사 열심히 챙겨
압축 성장하느라 서양의 '근대적 개인' 경험 못해본 우리…
內面에 대한 더 깊은 省察만이 고독에서 구원해줄 것

오늘도 또 부엌 한구석에 주저앉아 울었다. 외롭거나 서글퍼서가 아니다. 진짜 너무 아파서 울었다.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넣으려고 열어놓은 싱크대 모서리에 머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요즘 자주 그런다. 아주 환장하게 아프다. 눈물이 쪽 빠진다. 부엌 한구석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 잡고 끙끙대고 있는데, 틀어놓은 TV 아침 방송에서 '고독사(孤獨死)'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여자들의 70%가 죽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을 것 같다는 거였다. 
우아하게 혼자 죽는 법에 관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도 했다. 
눈물 찔끔대며 부엌에 주저앉아 있으려니 도무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일본 교토, 원룸 차가운 부엌 한 귀퉁이에서 
싱크대 모서리 받고 '고독사(孤獨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아주 심각하게 잠시 했다.

사실, 일본에서 고독(孤獨)은 아주 자연스럽다. 
오십을 넘겨 그림 공부하겠다며 건너온, 나이 든 유학생이 원룸 아파트에서 혼자 밥 해먹고, 혼자 돌아다녀도 하나도 
안 불편하다. 식당에서 혼자 밥 먹어도 쑥스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고독 순응 사회'다. 
고독(孤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일찌감치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서구 대부분의 나라도 그렇다. 
오래 사는 나라에서 고독(孤獨)은 당연한 거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고령화 속도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고독(孤獨)'은 아직 낯선 단어다. 
고독(孤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서 고독은 실패한 인생의 특징일 따름이다. 
그래서 아직 건강할 때, 그렇게들 죽어라고 남들 경조사에 쫓아다니는 거다. 
내 경조사에 외로워 보이면 절대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쁜 이유는 고독(孤獨)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고독 저항 사회'인 까닭이다. 
쉬어야 하는 주말조차 각종 경조사로 길거리가 미어터지는 이 한국적 현상을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김정운 그림
 김정운 그림


최근 발표된 자료를 보니 남자는 78세, 

여자는 85세가 평균 기대 수명이란다. 이제 나 같은 50대는

백 살까지는 충분히 산다. 1950년대 한국 남자의 평균수명은 불과 51.1세, 여자는 53.7세였다. 불과 백 년 사이에 

평균수명이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이토록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그 어떤 자연 변화나 사회변혁도 이 평균수명의 연장과 

비교할 수 없다.


평균수명 50세를 기준으로 이제까지 있어온 윤리, 

도덕적 기준도 죄다 바뀌게 된다. 

여기에는 부부 관계, 가족 관계도 해당한다. 

'폴리가미'까지는 아닐지라도 수차례 결혼·이혼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20대에 만난 사람과 백 년 동안 쭉 함께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지금의 그 남편과 앞으로 오십 년을 더 살라고 하면, 

우리나라 중년 여자 대부분은 차라리 고독사(孤獨死)하고 말겠다고 할 거다. 

'검은 머리, 파뿌리'는 평균수명 50세였던 시절의 전설일 따름이다. 그만큼 평균수명 100세는 엄청난 사건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게 된 각 개인은 그에 상응하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바로 고독(孤獨)이다.


사실 고독(孤獨)은 '개인'이 인류 역사에 처음 등장할 때 함께 나타난 현상이다. 

데카르트가 '나'라는 주어를 써서 주체의 존재 방식을 '사유'로 규정했을 때를 '근대적 개인의 탄생'으로 볼 수 있다. 

이 데카르트적 자아는 고립(孤獨)을 전제로 한다. 

세계와 타자로부터 독립된 자아의 확인으로부터 주체가 성립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명제를 심리학적으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나는 고독(孤獨死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개인 individual'이라는 서구의 존재론이 동양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세기 무렵이었다. 동양은 당황했다. 

individual에 상응하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 일본의 번역어 성립 과정에 정통한 야나부 아키라(柳文章)에 따르면, 

individual은 중국어로는 '일개인(一個人)' 또는 '독일개인(獨一個人)' 등과 같은 단어의 조합으로 번역되었고, 

일본에서는 일상어인 '사람(ひと)'으로 번역되었다. 

개인(個人)이 일상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일이었다. 

독(獨)이나 일(一)이 빠져버린 개인(個人)은 individual의 번역어로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당시 동양의 개인은 고독(孤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백 년에 걸친 서구의 근대화를 불과 수십 년 만에 해치운 압축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고독(孤獨)할 틈도 없었다. 

고독(孤獨)은 사치였다. 그러나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고독(孤獨)은 존재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고독 저항 사회'에서 고립된 삶은 '호환 마마'보다도 무섭다. 

고독(孤獨)에 대처하는 어떠한 문법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금만 보장되면 다 해결되는 줄 안다. 

다들 너무나 외로워 어쩔 줄 모르면서, 그야말로 고독(孤獨)에 몸부림치면서도 그게 자기 운명인 줄 모른다는 이야기다.


고독(孤獨)한 개인의 구원은 역설적으로 개인 내면에 대한 더 깊은 성찰로 가능하다. 

고독할수록 더 고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예술적 몰입일 수도 있고 종교적 명상일 수도 있다. 아, '팔굽혀펴기'일 수도 있다. 

하루에 수백 번씩 팔굽혀펴기를 하면 고독(孤獨) 따위는 아주 쉽게 견딜 수 있다고, 

언젠가 목욕탕에서 만난 김창근 SK수펙스 의장이 그랬다. 

이제까지 내가 본 어깨 중에 가장 멋있는 역삼각형 어깨를 가진 60 중반의 김 의장은 팔굽혀펴기를 하면 

중년의 허접스러운 성욕도 깨끗이 사라지고 정신도 아주 맑아진다고도 했다.

오늘 난 팔굽혀펴기 열다섯 번 만에 고독은 물론, 성욕도 깨끗이 다 해결했다. 

난 고작 열다섯 번이면 충분한데, 김 의장은 왜 하루에 수백 번씩 하는 걸까? 

아무튼 난 아주 맑은 샘물 같은 영혼을 지녔다.





<이글에 대한 조선일보 김정열독자님의 댓글이 마음에 들어 여기 부기한다.>


좋은 글이네요. 성욕은 팔굽혀 펴기 정도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아사 직전에도 꿈에 나타나는 것은, 풍성한 식탁이 아니라, 알몸의 여자이다. 

초기 기독교 성자들이 사막에서 마른 빵 한조각, 물 한모금에 의지해서 기도할 때, 

대부분의 꿈은 여자라고 기록해 놨다. 

음식남녀라고 하지만, 이는 확실한 오류이다.

 

인간의 뇌는,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고등포유류의 뇌로 나뉜다. 

사랑, 자비, 인, 고독 등은 포유류의 뇌의 활성화에 기인한다. 

파충류의 뇌나 고등포유류의 뇌를 활성화시키면 해결된다. 

젊은 이성을 가까이 한다든가, 음식에 집중하든지 등의 파충류적 방법이 있고, 

기도, 글쓰기, 독서, 토론 등 고등포유류적 방법이 있다. 


사명당 대사(四溟堂 大師)의 법명이 예사롭지 않다. 

溟이 검은바다 명이다. 사방이 바다인 땅이다. 

그 절해고도(絕海孤島)에서 대오(大悟)하겠다는 의지이다. 

절대 고독이 절대 자유이다. 그리 겁낼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