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人文,社會

[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意味'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바람아님 2015. 1. 23. 10:16

(출처-조선일보 2015.01.23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사진
불 피우려 캠핑? 불 앞에 모여살던 原始인류 습속 탓
공동체 한데 모여 '삶의 의미'를 공유하고 싶은 욕망
둘러앉지 않고 편 갈라 마주 보는 한국사회 문제 심각

내 친구 귀현이가 드디어 일을 저질렀다. 남이 운영하다 망한 캠핑장을 어느 날 불쑥 인수한 것이다. 
땅주인에게 월세를 조금만 내면 된다며 좋아한다. 
주말에만 손님이 있고, 주중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침을 튀겨가며 흥분한다. 돈 버는 건 별로 관심 없다
낮에는 나무·새·하늘을 사진 찍고, 밤에는 혼자 모닥불을 피워놓고 음악을 듣는단다. 
숲 속에서 그렇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너무 폼 난다며 행복해서 죽고 싶단다. 폼 나기는 개뿔! 
실제 가보니 월세가 그리 싼 이유가 있었다. 주변이 영 지저분하다. 
귀현이의 근본적인 문제는 '드~러운 것'과 '폼 나는 것'을 잘 구별 못 하는 거다. 
캠핑장도 어지럽고, 캠핑장 주인 행색도 아주 '드~럽다'. 또 아주 빨리 망할 것 같다.

캠핑장 아이디어는 원래 내 것이었다. 
수년 전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책을 냈을 때 나는 책이 잘 팔리면 캠핑카를 사겠다고 공언했다. 
책의 에필로그에 '나이 오십이 넘으면 일주일에 2~3일은 캠핑카를 타고 밖으로 나가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차를 세워놓고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끓이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글 쓰는 것이 내 꿈이다'라고 썼다. 
책이 무척 많이 팔렸는데도 정작 캠핑카는 사지 못했다. 
아내가 그따위 발칙한 제목으로 책을 팔았으면 인세는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며 모두 압수해갔다. 
내 캠핑카의 꿈이 이렇게 발목이 잡혀 있는 사이에 내 친구 귀현이는 아예 캠핑장을 운영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중년 사내들 사이에 요즘 부쩍 캠핑 붐이다. 외국도 마찬가지다. 
은퇴하고 할 일이 없어 죽어라 산에만 오르던 이들에게 캠핑은 아주 훌륭한 대안이다. 일단 장비가 죽인다. 
등산 장비는 기껏해야 옷과 신발, 배낭이 전부다. 
그러나 캠핑은 다르다. 준비해야 하는 장비의 종류가 장난이 아니다. 
그 모든 장비를 챙겨 차에 싣고 캠핑장에서 설치하는 모든 과정이 무척 폼 난다.

불을 피우고, 음식도 직접 한다. 
불편하고 귀찮다며 따라나서기를 주저하던 아내도 육체노동에 몰두하는 사내의 뒷모습에 감동한 눈빛을 보낸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수컷'의 느낌이 충만해진다.

	너의‘불타는 밤’은 나의‘불 때는 밤’ 작품 사진

 너의‘불타는 밤’은 나의‘불 때는 밤’. /김정운 그림


그러나 사내들의 모든 욕망이 그렇듯 캠핑 장비의 '허세(虛勢)'

또한 대부분 바로 '허무(虛無)'로 꼬리를 내린다. 

한 번 따라왔던 아내는 다시는 따라나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 좋은 집을 놔두고 그 고생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옳다. 그래서 물어보는 거다. 도대체 왜 캠핑일까? 

왜 캠핑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중년 사내들의 삶에 희망이

되는 걸까?

몇 달에 걸친 관찰 끝에 드디어 이유를 찾아냈다. 

사내들이 캠핑을 하는 이유는 불을 피우기 위해서다. 

바비큐를 하고, 요리를 하는 것은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불을 피우기 위해서다. 

중년의 사내들이 장작을 모아 불을 지피고 싶은 이유는 잊힌 삶의 의미(意味)를 되살리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 

의미는 불을 피울 때 만들어진다.

'의미부여(Sinngebubng)'는 인본주의 심리학 혹은 현상학적 심리학의 핵심 주제다. 

인본주의 심리학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을 설명하려는 행동주의 심리학이나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모방하려는 

실험심리학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되는 것은 동물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대상과의 관계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며 존재의 목적을 정당화한다. 

무기력이나 우울함은 그 목적이 정당화되지 않을 때 생긴다. 아우슈비츠라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 주장한 '로고테라피(Logotherapie)'도 바로 의미 부여라는 인간만의 독특한 존재 정당화 방식에 

관한 설명이다. 이 같은 현상학적 심리학의 인류학적 기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본의 사회철학자 이마무라 히토시(今村仁司)는 불을 피우는 행위는 의미를 구조화하는 '의례적 실천'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의례(儀禮)의 온톨로기(ontologie)'라는 책에서 의미 부여의 기원을 원시 인류의 불을 피우는 행위에서 찾는다. 

수렵 채취 사회의 원시 인류는 불을 피우는 행위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했다. 

공동체의 모든 문제는 장작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논의되었다. 

이해할 수 없고,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자연현상에 관해 불을 피워 놓고 밤새 이야기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인류의 근원적 질투심을 어떻게 처리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가를 토론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인 의미 부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모든 종교적 리추얼에 불 피우는 행위가 포함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둘러앉아야 의미가 부여된다는 이야기다. 

중년 사내들이 캠핑장에서 불을 피우는 이유는 둘러앉아 의미를 공유하고 싶어서다. 

왜 은퇴하고도 30여년을 더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그러는 거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는 이 같은 의례적 실천은 단지 중년 사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 편을 갈라 마주 보려고만 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긴급하게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장작불이 없으면 담뱃불이라도 켜고 둘러앉아야 한다.

마주 보는 방식으로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 그저 평행선이 끝까지 이어질 뿐이다. 

소실점 끝에는 그 평행선이 만날 것 같지만 그건 환상이다. 

그 끝에 가면 또 다른 평행선이 또 다른 소실점 끝까지 이어져 있을 뿐이다.


마주 보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의미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야 한다. 

단,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중간에 장작불을 걷어차고 집에 먼저 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