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3.10.11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거울 속 나와 실제 나의 가위바위보, 한쪽이 이긴다면?
그래서 무서운 이야기… 거울에 비친 나는 결코 내가 아냐
침팬지를 봐도 거울 속 나를 인식하려면 '사회적 자아' 필요
'나'는 하나가 아니란 것 인정해야 他人과 소통할 수 있어
밤에 거울 보고 가위바위보 했다. 내가 졌다! 이거 무지하게 무서운 이야기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소름이 확 돋는다. 이 이야기를 들은 후로 나는 가끔 밤에 화장실에서
거울 보고 가위바위보를 한다. 아주 묘하게 스릴 있다.
가까운 후배 재원이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 군대 시절 이야기를 한다.
자대에 전입신고를 하니, 고참들이 거울을 마주 보고 이길 때까지 가위바위보를 시켰다는 거다.
그래서 아직도 '거울 보고 가위바위보'는 아주 섬뜩하다고 한다.
도대체 왜 '거울 보고 가위바위보'가 이토록 두려운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도대체 왜 '거울 보고 가위바위보'가 이토록 두려운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거울 속의 나는 반드시 실제의 나와 똑같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절대 내 모습이 아니다. 일단 거울 속의 나는 3차원의 내가 2차원으로 축소된 결과다.
입체를 평면으로 압축하면 어떻게든 왜곡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인간의 눈도 마찬가지다.
3차원의 세계가 눈의 망막이라는 2차원의 화면에 반영되기 때문에 온갖 착시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거울 속의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나르시스만큼이나 황당한 일이다.
거울이 가지는 또 하나의 문제는 좌우가 바뀐다는 사실이다.
거울이 가지는 또 하나의 문제는 좌우가 바뀐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많이 시들해졌지만 여전히 유효한 뇌의 좌우분리설에 따르자면,
정서 표현을 조절하는 뇌의 우반구는 왼쪽 얼굴 표정에 더 깊이 관여한다. 왼쪽 얼굴의 정서 표현이 더 풍부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옛날 초상화들을 잘 들여다보면 주인공의 왼쪽 얼굴을 그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 젊은이들 셀카의 '얼짱 각도'도 대부분 자신의 왼쪽 얼굴을 향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맞은편 사람은 자신의 오른쪽 얼굴부터 본다.
상대방의 얼굴을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스캔한다는 이야기다(헷갈리니 잘 생각해보시기를).
시선이 오른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유에 관해선 가설이 분분하나 오른손잡이가 많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시선이 오른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유에 관해선 가설이 분분하나 오른손잡이가 많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책이 오른쪽 방향으로 쓰여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각 문화권마다 달라진다고도 하고, 이 또한 뇌의 좌우 분리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아무튼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의 모순관계는 아주 기초적인 얼굴 표정을 읽어내는 단계부터 엇갈려 있다는 이야기다.
인류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단순한 유행가 가사가 아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단순한 유행가 가사가 아니다.
인식의 주체가 어떻게 동시에 인식의 객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 제기다.
자아를 모나드(monad·單子)적 완결체로만 규정하면 도무지 풀 수 없는 모순이다.
이 심각한 패러독스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는 '자아(I)'와 '사회적 자아(Me)'의 관계로 풀어낸다.
자아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이야기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들이 내면화된 '사회적 자아(Me)'와
행위 주체로서의 '자아(I)'의 상호작용이 바로 '자아(I)'의 실체라는 주장이다.
독일 게슈탈트 심리학자 쾰러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 게슈탈트 심리학자 쾰러의 연구에 따르면,
무리 속에서 자란 침팬지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었던 반면,
고립되어 혼자 자란 침팬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인식하지 못했다.
'사회적 자아(Me)'가 있어야만 '자아(I)'가 성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아가 하나뿐이면 인지 능력에 치명적 결함이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러시아 문화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아란 사회적 상호작용이 내면화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러시아 문화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아란 사회적 상호작용이 내면화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모든 고등 정신 과정은 일단 상호작용에서 먼저 나타나고 내면화되어 개별적 자아의 특성이 된다는 이야기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는 문화적 산물로서의 자아는 그래서 '분열적 자아'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생각'이란 이렇게 각기 다른 분열적 자아들 간의 '대화'로 설명할 수 있다.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론과 같은 맥락이다.
/김정운 그림
'자아'가 오직 하나뿐이고, 일사불란하며 일관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심리학적 근본주의'다.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의 구성적 특징을
도무지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심리학적
근본주의가 종교적 근본주의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적 근본주의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분열적 자아들에
관한 해석학적 맥락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헉헉! 말이 많이 어려워졌는데 원래 자아니 심리니
(헉헉! 말이 많이 어려워졌는데 원래 자아니 심리니
하는 게 어렵다 보니 그런 걸로 이해하고
끈기를 발휘해줄 것을 부탁드린다. 다 끝나간다.)
소통 불가능의 심리학적 근본주의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폭력과 억압으로 이어진다.
이는 모든 이데올로기의 양극단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문화적·사회적·심리적 맥락에 관한 이해를 동반한다. 예수, 석가, 공자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문화적·사회적·심리적 맥락에 관한 이해를 동반한다. 예수, 석가, 공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해석학적 맥락을 제거하면 그들은 인종주의자거나 남성 우월주의자에 불과하다.
타인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에 옳고 그름을 따지며 단죄부터 하려고 달려들지 말자는 이야기다.
타인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에 옳고 그름을 따지며 단죄부터 하려고 달려들지 말자는 이야기다.
타인의 분열적 자아가 속해 있는 해석학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소통의 시작이다.
아울러 이런 방식의 소통이야말로 자신의 분열적 자아에 대한 성찰적 근거가 된다.
어떤 경우든 해석학적 여지를 남겨 놓아야만 살 만한 사회가 된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나'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만 인정하면 '거울 보고 가위바위보'가 더는 안 무서워진다.
아무튼 '나'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만 인정하면 '거울 보고 가위바위보'가 더는 안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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