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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비데, 휴지, 그리고 마우스

바람아님 2015. 1. 18. 13:16

(출처-조선일보 2013.06.28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마우스로 인한 사고 패턴 변화, '멀티 태스킹'이 특징
어릴 때부터 컴퓨터 익숙해 산만해 보이는 젊은 세대
매체 따라 사고 구조도 달라져… 소통 부재의 원인
이전 세대는 좀더 '세련'되게 생각할 필요 있어

다 쥐 때문이다. '그 쥐'(!)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컴퓨터의 마우스다. 
한국 사회가 이토록 소통이 힘든 사회가 된 까닭은 바로 그 마우스 때문이다. 
인간 의식의 진화 과정은 마우스 사용 전과 후로 나뉜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사실 너무 많이 건너뛴 이야기다. 
도대체 그 결정 과정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관한 설명이 빠졌기 때문이다. 
뒤늦게 비고츠키나 루리아와 같은 발군의 러시아 심리학자들이 
언어 등의 문화적 기호 체계로 매개되는 의식 구성 과정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호학적 매개론(semiotic mediation)'은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적 사유의 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이론은 바로 제거되었고, 그 후로 소비에트에서 기억할 만한 심리학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다고 오늘날 '심리학 전성시대'를 이끌고 있는 환원론적 미국식 심리학이 1930년대의 그들보다 더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현대 심리학의 계량주의는 참 많이 어설프다. 또 위험하다.

인간 의식의 변화를 설명하는 강력한 이론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기존 학문 분과 어디에도 끼워 넣기 어려운 '미디어론'을 들고 나온 마셜 매클루언이다. '매체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거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의 생각과 라디오만을 듣는 사람의 생각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다. 
매클루언의 매체결정론은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보다 더 예언적이다.

내 '쥐' 이야기로 돌아가서 설명해보자. 
A4용지를 쓰는 사람의 생각('A4적 사고')과 마우스를 쓰는 사람의 생각('쥐적 사고')은 근본이 아예 다르다는 이야기다. 
활자 발명 이후,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A4적 사고'는 일단 선형(線形)적이다. 
연역, 귀납의 논리가 직선으로 A4용지에 가득 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직선적 사고는 A4용지를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된다.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논문'을 쓰는 일이다. 
논문은 각주(脚註)와 미주(尾註)를 사용해 A4용지 안팎을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석사, 박사과정에 그토록 비싼 등록금을 내는 이유는 바로 이 각주와 미주를 사용할 권리를 얻기 위해서다.

인간 사유의 본질은 '날아다니기'다. 멍하니 있을 때, 생각은 날아다닌다. 
'A4적 사고'는 인간 사유의 창조적 본질을 억압한다. 오직 천재들만이 이 억압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의 생각은 책상 주변만 빙빙 돌아다닐 뿐이다. 그러나 천재들의 생각은 아주 멀리까지 날아간다. 
그리고 돌아온다. 생각이 아주 멀리 갔다가 아예 안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전문용어로 '또라이'라고 한다.

컴퓨터의 마우스는 'A4적 사고'의 틀을 통째로 뒤집어 버렸다. ('터치'는 마우스에 피부를 입힌 것으로 봐야 한다.) 
'클릭'하면 바로 A4용지 밖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논리적, 비선형적이다. 
그래서 마우스로 매개되는 '쥐적 사고'의 형식을 '하이퍼텍스트'라고 한다. 
이제 일부 천재만 가능했던 '생각 날아다니기'를 보통 사람들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데'나왔다고 '휴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김정운 그림

'쥐적 사고'의 더욱 결정적인 특징은 '멀티 태스킹'이다. 클릭할 때마다 텍스트를 뛰어넘어, 전혀 다른 매체로 이동한다. 

메일을 체크하면서 뉴스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중간중간, 날아드는 트위터에 일일이 답도 한다. 

이제까지 정신병리학적 장애로 여겨졌던 주의 산만, 집중력 장애가 일반적 사고 패턴이 되어 버린 것이다.

'A4적 사고'는 '책이 놓여있는 책상'이라는 전제에서 기능한다. 그러나 '쥐적 사고'는 책상이 필요 없다. 

책상이 동시에 세 개도 되고 네 개도 된다. 

실제 컴퓨터 운영체제 개발자들은 바로 이 '책상'이라는 메타포로 야기되는 상상력의 빈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아예 '데스크(책상)'라는 용어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윈도를 사용했던 30대 후반까지가 '쥐적 사고'를 한다고 볼 수 있다. 

'A4적 사고'를 하는 그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도구 차이가 아니다. 매체가 다르면 사유 내용이 달라지고, 결국 존재 양식마저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쥐적 사고'를 참을 수 없이 가볍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너희는 왜 그렇게 생겼느냐고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 젤 치사한 게 생긴 것 가지고 뭐라 하는 거다.

한국 사회의 소통 부재는 'A4적 사고'와 '쥐적 사고'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정치적 포지셔닝은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같은 'A4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갈등의 외피를 입고 있는, 도무지 교환할 수 없는 사유 방식의 차이, 존재 양식의 갈등은 거의 문명 충돌에 가깝다. 

이렇게 교묘하게 은폐된 갈등은 '쥐적 사고'가 대세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물론 시간은 그들의 편이다.

아, 그렇다고 'A4적 사고'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비데 나왔다고 휴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휴지는 더 고급이 되어야 한다. 어설프게 싸구려 휴지를 썼다간 너저분하게 낀다. 

특히 요즘 같은 여름에는 예민한 그곳의 살갗이 까지기까지 한다. 

비데와 휴지의 모순 관계에서 휴지가 살아남는 길은 고급이 되는 길뿐이다. 

이젠 제발 좀 세련된 'A4적 사고'를 하자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