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人文,社會

[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더 자도 된다! 朝刊(아침신문)은 좀 더 있어야 온다!

바람아님 2015. 1. 21. 18:54

(출처-조선일보 2013.12.13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이 땅의 중년 사내들, 世上事 맘대로 안 되면 불안
노력만으로 성공한 줄 아는 '통제 강박' 탓
성공은 '운'에 달렸으니… 푹 자고 많이 웃어야
運命 앞에 자신을 낮추고 비울 줄 알아야 행복해진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언젠가부터 중년 사내들이 카카오톡으로 집단 문자를 돌려 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지리멸렬한 내용이다. 문자는 대충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억지 감동인 듯해서 많이 민망해지는 이야기, 공감은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울한 회상, 
그리고 어설픈 유머다. 물론 눈이 번쩍 뜨이는 흥미로운 자료도 아주 가끔 있다. 
내게는 개그맨 남희석이 보내주는 최신 자료(!)가 아주 뜨겁다. 
홍성태 교수는 취향이 아주 특이한 자료를 많이 보내준다.

똑같은 내용이 수십 번 들어오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받은 내용은 '골프와 자식의 공통점'이다. 
'쥐어 패면 안 된다!' '끝까지 눈을 떼면 안 된다!' 등과 같이 '피식' 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첫째로 올라 있는 자식과 골프의 공통점, 즉 '내 맘대로 안 된다!'에는 아주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면 '내 맘대로 안 되는 자식'이 당연한 거다. 
오히려 '내 맘대로 되는 자식'이야말로 나중에 큰 걱정거리가 된다.

세상사가 내 맘대로 안 된다고 화내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성공한' 이 땅의 중년 사내들은 자신을 둘러싼 일들이 맘대로 안 되면 불안해 어쩔 줄 모른다. 
'통제 강박'이다. 자신의 성공을 불굴의 투지와 노력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통제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자꾸 새벽 4시면 잠을 깨는 거다. 
가족 다 자는 새벽에 혼자 일어나 이제는 신문이 왔나 하며 자꾸 현관문을 열어보게 되는 것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러지 말라! 그러다가 다들 한 방에 훅 간다.

성공을 사회적 지위나 재화의 수준으로만 규정한다면, 성공은 순전히 '운'이다. 
아무리 '열씨미' 해도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성공에는 '열씨미'보다 재능이나 성격이 더 중요하다. 
일단 재능이 있어야 한다. 
지난 13년 동안의 내 교수 생활에서 얻은 결론이다. 
재능 없는 학생이 '열씨미' 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능력 없는 CEO가 '열씨미' 하는 것만큼이나 환장하는 일이다. 
나이 오십을 넘겨 발견한 내 예술적 재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아, 죄송하다. 그러나 난 내가 그림을 정말 잘 그린다고 믿는다! 예술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전교 400등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주제에 공부하겠다고 독일 유학 가서 십 몇 년 고생한 생각 하면 지금도 아주 아찔하다.

성격도 매우 중요하다. 공부도 성격이다. 대개 성격 못됐고 집요한 아이들이 공부 잘한다. 
내 두 아들은 성격이 아주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성공도 마찬가지다. 
불확실한 상황에 서슴없이 달려드는 용감한 이에게 성공의 '운'이 찾아올 확률이 더 높다. 
매일 똑같은,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어떤 새로운 기회가 생기겠는가? 
물론 그만큼의 실패도 감내할 수 있는 대담한 성격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확실성의 용기와 실패의 대담함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재능이나 성격도 다 '운'이다. 그러나 다들 '열씨미'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우긴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폼 나기 때문이다. 
성공을 노력의 결과로 설명하는 인과론이 산업화 시대에는 아주 폼 나는 내러티브였기 때문이다. 
통제 강박, 불안의 원인이 되는 이런 식의 '노력과 성공의 인과론'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식 성공 처세서가 세계 출판물 시장을 휩쓸기 시작한 20세기 후반에야 나타난 현상이다. 
정신없고 불안한 시대일수록 어설픈 '노력―성공의 인과론'이 잘 먹힌다. 
명확하고 간결하기 때문이다.

[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더 자도 된다! 朝刊(아침신문)은 좀 더 있어야 온다!
/김정운 그림
미국 문화사학자 스티븐 컨은 원인과 결과를 규정하는 인과론적 설명 자체가 19세기 중반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기 때문이다. 
변화의 속도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해주는 변화의 인과론적 
설명은 종교적 위안에 가까웠다. 
이후 인과론, 결정론, 법칙, 발달, 예측 등의 개념이 인문학, 자연과학의 전문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예측과 통제의 19세기적 인과론은 시대적 한계를 가지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이 스티븐 컨의 주장이다. 
19세기적 인과론을 21세기의 다원화된 세계에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시대적 맥락을 제거한 개념의 섣부른 보편화는 온갖 부작용을 낳는다. 
역사 발전의 단계론적 환원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단선론적 진보의 도그마에 빠진다. 
'노력과 성공의 인과론'적 환원은 각 개인의 통제 강박과 불안이라는 막힌 길로 들어선다. 
'노력―성공의 인과론'도 마르크스주의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야기다.

노력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충 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자신의 작은 성공을 '열씨미'만으로 설명하지는 말자는 거다. '열씨미의 통제 강박'에 빠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안하지 않아야 성공한 삶이다. 잠 푹 자고, 많이 웃는 삶이 진짜 성공이다.

하나 더.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겸손은 대부분 티 나는 억지 겸손이다. 
타인의 질투심을 자극해 쓸데없이 해코지당하는 일을 피하려는 비겁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가짜인 거 다 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는 진실로 겸허해야 한다. 
모두 내가 다 노력해서 된 거라고 우기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새벽에 불안해하며 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