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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희 칼럼] 그래도 일본에서 더 배워야 한다

바람아님 2015. 10. 29. 08:12

(출처-조선일보 2015.10.29 강경희 경제부장)

日 기업들 장기 불황 거치며 기술력 무장해 경제 떠받쳐
韓 주력 산업 줄줄이 빨간불, 對日 무역 50년간 매년 적자
내달 2일 한·일 정상회담 땐 실리 챙기는 유연한 접근을

강경희 경제부장 사진얼마 전 한 일본 기업의 창립 행사에 초청받아 강연하고 온 전직 경제 관료한테 들은 얘기다.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해외 지사 사장단을 포함해 그 회사 임원 100여 명을 앞에 놓고 

세계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그 속에서 어떤 미래 전략이 도움될지를 조언해주러 갔다는데, 

오히려 그 회사에서 배우고 돌아온 게 많다면서 인상 깊었던 점을 들려주었다.

그 회사는 편광 필름 등을 만드는 일본 화학 회사 니토덴코(日東電工)다. 

지난해 매출은 약 8조원. 일본에서 매출 100위 안에 드는 대기업도 아닌데 글로벌 1위 품목을 

가진 회사로 창립 97주년을 자축하고, 회사를 처음 시작한 곳에 R&D센터를 짓고 

미래의 100년을 향해 또 다른 혁신을 준비하는 게 놀라웠다는 것이다.

초창기에 절연 테이프를 만들던 회사였는데 현재는 LCD용 편광 필름부터 강아지 털 제거 테이프에 이르기까지 제품을 

무려 1만3000가지 갖고 있다. 오만 가지 다 손대는 것 같아 보여도 이 회사의 기술력은 딱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필름과 그 필름을 붙이는 접착제, 이 기술을 꾸준히 개발하고 시대에 맞게 이리저리 응용하면서 글로벌 틈새시장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자랑하는 이른바 '니치 톱(Niche Top)'이 된 회사다.

예전에 히타치 계열사였는데 일본 불황기에 독립 회사로 떨어져 나와 딱히 오너도 없다. 

그런데도 97년 역사 동안 회장은 10명뿐이다. 제일 실력 있는 선수를 골라 릴레이 경주에 출전시키듯 현 회장이 임원 중에 

차기 회장감을 골라 사장으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100년 기업이 됐다. 

이 회사 초봉은 일본의 은행원 초봉보다 높은 월 30만엔 선. 45세가 지나면 성과 따라 연봉이 달라지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업 문화도 갖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요란한 성공에도 별로 감탄 않던 그 전직 관료는 이 회사를 다녀와서는 "뛰어난 기술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실용적 능력주의가 정착된 임금 체계와 합리적 승계 문화도 부러웠다. 

그런 회사가 한국에도 많아져야 한국 경제에 미래가 있는 것 아닌가" 했다.

아베노믹스가 촉발한 일본 경제의 부흥은 단지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돈을 풀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은 아니다. 

그게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20년 불황을 거치면서 단단하게 구조조정을 한 기술력 있는 일본 기업들이 버티고 있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최근 한국 경제 성적표는 너무 우울하다. 

정부가 돈 풀고 내수 불 때기에 나서 올 3분기에 성장률이 5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지만 

조선 3사가 천문학적 적자를 내는 등 한국의 주력 산업에는 줄줄이 빨간불이 켜졌다. 

현대중공업이 10여년 전 스웨덴 말뫼에 있는 조선소에서 단돈 1달러에 사들여 '말뫼의 눈물'이라고까지 했던 

대형 크레인 얘기가 이젠 우리 얘기가 될 판이다. "삼성이 일본 소니를 제쳤다"고 환호한 지 불과 몇 년도 안 돼 

중국의 샤오미가 한국의 삼성전자를 능가할 날이 코앞이다. 

청년 일자리만 못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제조업 경쟁력과 역동성 자체가 떨어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7년. 세계경제는 장기 불황으로 접어들고, 위기에서 승자와 패자도 다시 갈리고 있다. 

위기 주범인 미국은 달러의 힘을 바탕으로 제일 먼저 체력을 회복했다. 

중국 경제는 고속에서 중속으로 감속한다지만 그동안 일군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위기 직후 상대적으로 선방했다는 한국의 잔치는 너무 짧게 끝났다. 

한국 경제는 국제적 불황과 국내의 더딘 체질 개선이 맞물리면서 뒤늦게 긴 터널로 들어서고 있다. 

정부는 저만치 미뤄뒀던 기업 구조조정을 이제야 서두르겠다며 목소리 높이지만 얼마나 구조조정이 이뤄질지도 의문이고, 

정부와 은행들이 간당간당하는 기업 몇 곳 문 닫게 한다고 경쟁력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20년 전 일본이 갔던 저성장, 장기 불황 비슷하게 쫓아가는 한국이 혹한기를 견뎌낸 일본 기업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배우면서 우리의 경제 근육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다.

다음 달 2일 박근혜 정부 들어 첫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다. 올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았다. 

따지고 보면 지난 반세기의 경제 성장도 극일(克日)을 위해 일본을 배우면서 이뤘다.  

하지만 대일(對日) 무역에서 단 한 해도 흑자 내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가 이 악물고 더 배워서라도 이겨야 할 상대다. 과거사 

문제도 중요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50년 전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온 국민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 수교를 

강행했을 때의 그 고뇌와 실리 전략을 되돌아보면서 좀 더 담대하면서도 유연하게 양국 관계를 풀어나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