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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터치] "열심히 일하는데 왜 살기가 힘들지?"

바람아님 2016. 9. 24. 23:56
조선일보 2016.09.24. 03:05 

美 전직 고위 외교관들은 클린턴 지지하고 장성들은 트럼프 지지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무관심 택시기사들에 이유 물었더니 "먹고살기 바빠서"라고 다들 미래에 불안 느껴
미국 전직 고위 외교관 70여명이 22일 민주당 대선 후보 클린턴을 찍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새로울 건 없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공화당 주요 인사, 외교·안보 전문가, 일부 의원들이 이미 공화당 후보 트럼프가 외교와 국제 문제에 너무 무지하고 무모하다며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다.

트럼프 쪽도 움직였다. 이달 초 약 90명의 은퇴한 장성과 군 인사들이 트럼프야말로 미국 안보 태세를 바꿀 지도자감이라며 지지 입장을 밝혔다. 뉴욕타임스에 전면 광고까지 냈다.


미국 사회의 내로라하는 '윗물'과 '먹물'들이 큰맘 먹고 내린 결정은 큰 뉴스였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 막후에서 뛰었던 인사들은 효과가 너무 없어 당황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왜 '거물'과 '엘리트'의 움직임이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까. 워싱턴 시내에서 자주 이용하는 '우버(Uber)'가 의외의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우버는 공유 경제의 대표 선수로 꼽히는 차량 공유 서비스다. 쉽게 말하면 스마트폰으로 이용하는 자가용 택시다.


우버를 탈 때마다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최근 직장을 잃었거나 은퇴한 사람이 많았다. 당장 일자리를 못 구하니 자기 차를 끌고 거리로 나온 것이다. 대출받아 새 차를 장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퇴근 후나 주말에 우버 기사로 몇 시간씩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직장에서 버는 돈만으론 비싼 워싱턴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일반 택시 기사가 들려주는 민심 분석과는 또 다른 생생한 민심이 거기 있었다. 그래서 우버를 탈 때마다 작정하고 취재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낯선 사람과 정치 얘기 안 하는 거 모르느냐"는 면박도 받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을 들려줬다.

두 번이나 마주친 50대 백인 여성은 "나는 대학 나왔고 외국에도 많이 가봤지만 이제 일자리는 못 구한다"고 했다. 그는 "남편도 더 좋은 일자리를 가질 만한 능력과 자격이 되는 사람인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나라가 뭔가 잘못된 거다"라고 했다.


사이클 선수 하다 은퇴하고 볼링장을 열었다가 망했다는 중년 남성 우버 기사는 "내가 생각하는 아메리칸 드림은 별 게 아니다. 그냥 우리 부부 먹고살고 자식에게 아주 조금 뭔가 남겨주는 거다. 그런데 이제 미국은 그게 불가능한 나라가 됐다"고 했다. 낮에 스쿨버스 기사로 일하고 밤이 되면 아이 재워놓고 나와 운전한다는 무슬림 엄마는 "아이가 셋이라 어떻게 해서든 더 벌어야 한다"고 했다. 다들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열심히 일하고, 법을 어기지도 않고, 예전에 하던 대로 계속하고 있는데 점점 더 살기가 힘들다"였다.


미국의 보통 사람들을 만나 보면 쇠락해가는 지역인 러스트벨트가 아닌 곳에서도 다들 뭔가 불안해한다. 최근 오래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된 한 중년 남성은 "다들 변화해야 한다는데 우리 같은 사람에게 변화는 가장 늦게 오고, 알았을 땐 이미 뒤처져 있더라"고 했다.

여론조사하듯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가장 자주 듣는 대통령 자질은 '믿을 수 있는' '정직한' 그리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이다.


워싱턴에 와서 선거 전문가, 정치학자, 여론조사 전문가들을 만났다. 그들의 대선 분석도 의미 있었지만 "정부를 제대로 일하게 할 대통령 한 명 뽑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라는 스물여덟 살 흑인 우버 기사의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잘못한 것도 없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도 왜 나아지는 것은 없는 것일까. 제대로 일할 줄 아는 정부만 있어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도 내년 대선에서 이와 비슷한 불안과 분노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