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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리콴유에게 배우는 한·일 외교의 해법

바람아님 2015. 3. 29. 10:16

[중앙선데이] 입력 2015.03.29 



일본 도쿄의 주일 한국문화원이 지난 25일 밤 불에 그슬렸다. 달아난 방화범은 반한 감정을 가진 우익 분자로 보인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최근 들어 일본 내의 반한 감정이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반한을 넘어 혐한(嫌韓)에 이른 일본인들의 정서는 2012년 12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 발족 이후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보여 왔다. 얼마 전 한 일본 민방은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한 파트너가 아니다. 한국은 반일로 자멸할 파산국가”라는 코멘트를 내보냈다. 또 “지금 한국의 반일 풍조가 고조된 이유는 그동안 일본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뒀기 때문이다” “한국은 버블 붕괴와 디플레이션으로 2~3년 내에 붕괴할 것이다”는 말도 전파를 타고 일본인들의 안방에 전달됐다.

 일본에서 반한 감정은 더 이상 극우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범한 일본인들에게도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서점에는 『한국경제 벼랑 끝』『한국경제가 붕괴할 수밖에 없는 이유』 등 선정적 제목의 책들이 넘쳐난다. 지성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에서도 이른바 ‘반한 교수’들이 한국 유학생들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지경이 됐다.

 정부 레벨의 정치적 대립은 사안에 따라 고조되기도 풀리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까지 상대방에게 근거 없이 격앙된 감정을 지니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본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도 반일 감정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게 실리적으로 추진해야 할 경제교류나 안보협력을 고비마다 가로막곤 한다. 2012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서명식 당일 깨진 게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얼마 전 한·일 통화스와프 협정의 만료에도 경제적인 고려 외에 감정적인 영향이 없었다곤 보기 어렵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 교과서, 영유권 분쟁이 불거질수록 양국 국민의 상대방 국가에 대한 반감은 상승곡선을 타기 마련이다. 양국 정권이 이를 방치하거나 때론 활용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감정에 편승해 정치적 이익을 노렸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27일자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의 희생자”라고 표현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위안부 강제 동원의 주체를 일본군이나 관헌이 아닌 민간업자들에게 돌리려는 ‘물타기’ 의도가 잘 드러난다. 위안부 희생자들에게 동정을 표하긴 했지만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배상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기존의 자세를 재차 강조한 것이다.

 우리가 먼저 흥분할 필요는 없다. 아베와 아베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본인 전체를 배척하거나 증오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국민은 영원히 대를 이어간다. 정부와 정치인 탓에 양국 국민의 마음이 서로 멀어진다면 도대체 누가 이익을 보겠나.

 29일 싱가포르 국부 리콴유 초대 총리의 장례식이 열린다. 그는 생전에 감정을 배제한 철저한 실용주의 외교로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잔학한 점령통치를 했던 일본도 선뜻 용서해줬다. 그토록 혐오했던 공산주의자들과도 손을 잡았다.

 그를 추모하며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익 우선의 실용외교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아베 정권에 대한 반감은 반으로 숨기고, 일본 국민에 대한 관심은 배로 늘릴 필요가 있다. 더 늦기 전에 실리적인 ‘투 트랙’ 전략을 보여줘야 한다.


[오늘과 내일/한기흥]리콴유 모델 ‘美中 외교’

한기흥 논설위원

동아일보 2015-03-28

한기흥 논설위원

한국이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막판에 가입하는 바람에 실리를 다 챙기지 못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미국 눈치를 봐야 하니 정부로선 애초에 갈 길이 분명했다 해도 고심이 컸을 것이다. 일본은 확실하게 미국 편에 서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지만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미중 사이에서 고심해야 하는 숙명을 비슷하게 안고 있다.

고래 싸움에 낀 새우라고 모두 등이 터지는 건 아니다. 독립 초기 ‘독새우(poisoned shrimp) 독트린’을 천명했던 싱가포르가 그렇다. 약소국이라 남에게 먹히기 쉽지만 공격하는 쪽도 탈이 날 것이라는 비유였다. 그 나라가 지금은 ‘고슴도치’ 단계를 거쳐 확실한 ‘돌고래’ 국가가 됐다는 평을 듣는다. 돌고래는 지능, 민첩성이 뛰어나고 상어도 공격할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도 있다. 세계 금융, 교역의 허브로 만만치 않은 국방력을 갖춘 강소국(强小國)에 딱 들어맞는다. 중립과 균형을 앞세운 실리외교의 성과다.

싱가포르는 대만에 군사기지를 둔 유일한 국가다. 1974년 리콴유 총리와 장제스 대만 총통이 맺은 성광(星光)계획에 따라 싱가포르군은 대만에서 보병 포병 전차 등을 동원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해 오고 있다. 주로 대만 남부 핑둥 현 일대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진 양국의 연합 전술훈련엔 1만 명 정도의 병력이 참여한다.

중국의 심사가 편할까. 훈련 장소를 중국 하이난 섬으로 옮기라고 압박했지만 싱가포르는 ‘하나의 중국’ 인정과 대만과의 군사교류는 별개라며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최신 무기와 장비를 투입하진 않는다. 작년 11월엔 싱가포르가 중국에서 인민해방군과 8일간 연합 군사훈련을 벌여 대만이 발끈했다.

싱가포르는 한편으론 니미츠급 미국 항공모함 2대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도록 창이 해군기지를 2001년 증축하고 미국의 주요 군사작전을 지원한다. 안보 면에선 동맹과 다름없는 파트너십을 유지한다. 이에 중국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경제 면에선 싱가포르와 특수 관계이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리콴유 모델을 참고해 개혁 개방에 나선 이후 싱가포르는 대규모 투자로 화답했다. 미중이 모두 싱가포르의 전략적 중요성을 비중 있게 인정하는 이유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어서 싱가포르처럼 균형외교만 추구하긴 어렵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 말처럼 쉽겠는가. 우리에겐 미중이 가장 중요한 나라지만 양국의 세계전략에서 한국은 후순위인 것이 현실이다. 선택권은 우리보다는 강대국인 미중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앞으로 더 심각한 선택을 요구받을 수도 있다. 우리가 상황을 주도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

게다가 미국으로선 미일동맹이 한미동맹보다 중요하고, 중국으로선 북과의 혈맹을 저버리기 어려운 것도 분명하다. 존 매케인 미 상원의원이 “열렬한 아베 지지자”라고 공언한 것이 기가 막혀도 각 분야에서 촘촘하게 얽힌 미일관계를 한미관계와 냉철히 비교해 보면 미국의 일본 중시를 타박할 수만도 없다.

여러 모로 상황이 녹록지 않지만 그래도 동맹인 미국과 전략적 협력동반자인 중국을 대등하게 봐선 곤란하다. 주권국으로서 동맹에 대해 ‘노(No)’라고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 마땅하나 기본적으론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것이 동맹이다. 한미동맹을 시대에 맞게 리모델링해 더 유용한 자산으로 삼은 토대 위에서 주변국을 설득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실용외교다. 리콴유가 한국 지도자였더라도 그랬을 것 같다.

한기흥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