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누구나 감성에 젖는 계절
(사랑 얘기에 푹 빠진 처녀) 친한 친구가 있는데 사랑 이야기만 나오면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사랑이란 것, 따뜻하고 아름답잖아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다가서는 것도 사랑이고요. 그런데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싫어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는 ‘세상에 상처나 이별만 가득한 사랑이 넘친다’며 그게 싫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그래도 ‘사랑은 좋은 거니까 이야기하자’고 하면 ‘절대 하지 말라’고 강하게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친구도 사랑에 대해 자유로운 생각을 하게 될까요. 같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행복해지면 좋은데, 그러지 못하면서 외로움만 느끼는 친구가 안쓰럽네요.
(왠지 부러워하는 윤 교수) 오늘 사연의 두 분은 실제로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진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사랑과 더불어 이별의 상처라는 사랑의 한계까지 이야기하고 계시니까요. 혹시 두 분이 이성 간이라면 사랑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이야기는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죠. 지금 관계가 소중하기에 조심스럽게 진도를 나갔으면 하는 걸 테니까요. 한 발 한 발씩 진도를 나가고 싶은 거 아닐까요. 맹목적인 격렬한 사랑이 남기는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라 짐작됩니다. ‘썸 탄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썸 타는’ 이성 관계가 아니고 두 분이 동성이라면 두 분의 사랑에 대한 느낌이 매우 다른 거라고 보입니다. 사연 주신 분은 사랑을 따뜻하고 아름답고 긍정적인 효과를 가진 것으로 이야기하고 친구는 상처나 이별만 가득한 사랑이 넘친다고 하고요. 무엇이 정답일까요, 정답은 둘 다죠. 사랑이란 동전 앞면에는 만남·설레임·친밀감이 있다면 그 뒷면에는 갈등·이별·고통이 있습니다. 이별 없이 평생 가는 사랑도 종종 있지 않냐고요. 없습니다. 아무리 정서적으로 사랑이 유지된다고 해도 우리 몸이 영원하지 않으니까요. 사별이란 생물학적 이별을 언젠가는 경험하게 되죠.
이 사연을 읽으며 전 봄이 오긴 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봄 기운은 우리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만들고, 또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하니깐요.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계절, 봄인 거죠.
02 봄 안 타는 뇌는 ‘전투상태’
‘썸 타는’ 이성이면 좋은데 동성 친구입니다. 전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입니다. 그러고 보니 겨울에는 별로 이런 느낌이 없었는데 봄이 되면서 마음도 울렁거리고 기분이 좋았다가 푹 가라앉기도 하고 널을 뛰네요. 파란 하늘 보면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요. 여자는 봄을 많이 탄다고 하는데 저한테 봄 우울증이나 조울증이 온 걸까요. 이런 감정의 울렁거림을 어떻게 다뤄야 하나요.
어떤 봄 노래 좋아하시나요? 귀에 익숙한, 가수 로이킴의 ‘봄봄봄’이란 노래가 있죠. ‘다시 봄봄봄 봄이 왔네요/ 그대 없었던 내 가슴 시렸던 겨울을 지나/ 또 벚꽃 잎이 피어나듯이 이 벤치에 앉아 추억을 그려 보네요/ 사랑하다 보면 무뎌질 때도 있지만 그 시간마저 사랑이란 걸 이제 알았소’라고 노래합니다.
그룹 ‘버스커버스커’가 봄을 노래한 노래도 있죠. 봄만 되면 인기 순위권에 진입해 ‘봄 캐롤’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노래는 ‘그대여 그대여’라는 가사로 시작합니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바람 불면 울렁이는 기분 탓에/ 나도 모르게 봄바람 불면/ 저편에서 그대여 니 모습이 자꾸 겹쳐.’ 이런 가사인데요. 노래 제목이 ‘벚꽃 엔딩’입니다. 봄을 노래하면서 ‘엔딩’이라니. 따스함과 슬픔이 겹치는 느낌입니다.
두 노래 모두 화사한 봄을 노래하기는 하는데 듣다 보면 구슬픈 마음이 찾아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벚꽃이 모두 등장하고요. 벚꽃은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이 우리 삶과 무척 닮아있다고들 하죠. 우리의 삶이 젊음의 한순간을 정점으로 늙어가듯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던 화려한 벚꽃이 만개하고는 쓸쓸하게 집니다. 절세미인이란 꽃말을 가진 벚꽃, 화려한 만큼 시들어가는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인생의 느낌, 봄의 느낌, 그리고 벚꽃의 느낌이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계절성 우울은 겨울에 가장 많습니다. 추운 날씨에 뇌가 긴장해 피로를 느끼고 불안·우울·불면증이 생기게 됩니다. ‘어 아닌데 무언지 봄에 더 마음이 울렁거리는데’라고 생각되시나요. 겨울 우울과 봄의 울렁거림은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느낌입니다. 봄의 울렁거림은 뇌의 감성 예민도라고 할까요. 감수성이 증가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모두가 감성적으로 섬세한 시인이 되는 계절이죠. 그래서 추억의 장소를 가면 더 강하게 과거의 로맨스가 떠오르고, 파란 하늘을 바라볼 때 상큼한 느낌이 들면서도 갑자기 눈물이 맺히기도 합니다.
봄에 해야 할 취미 활동은 이 봄의 울렁거림을 즐기는 겁니다. 난 봄이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면 너무 서글픈 상태입니다. 뇌가 전투 상태라 벚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러지, 조울증 아닌가’라며 계절이 주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걱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울증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봄의 감정 기복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날씨이기에 우리 마음에 이완이 일어나고 이완은 삶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활성화시킵니다. ‘삶이란 무엇이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하는 본질적인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누구의 시린 눈물이 넘쳐 저리도 시퍼렇게 물들었을까’라는 시처럼 시적 감수성도 섬세해집니다.
성취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끼어든 철학적 사고와 시적 감수성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정신 차려야지 왜 이러는 거야, 잡생각 말고 열심히 살아야지’하며 스스로의 의지력이 약한 걸 탓하고 마음을 다시 잡기 위해 애써봅니다. 그러나 쉽지가 않습니다. 계절에 대한 마음의 반응은 이성적 통제를 넘어선 자연스러운 감성 시스템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 했습니다. 겨울에서 봄으로의 계절 변화는 내 마음을 멀리서 바라보는 줌렌즈를 활성화시켜줍니다. 멀리서 볼 때 삶이 희극으로 느껴지는 것은 멀리서 본 삶이 꼭 아름답기 때문은 아닙니다. 멀리서 보면 더 넓게 보이고 내가 고민으로 여겼던 부분에 대해 집착이 옅어지며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높게’라는 삶의 표어가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삶이 너무 피곤해집니다. ‘인생 뭐 특별한가’라는 약간의 염세주의적 사고를 가질 때 사람의 행복감이 오히려 잘 유지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본질적으로 쓸쓸하고 허무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질 때 가볍지 않은, 중후한 행복감이 내 마음에 자리 잡게 됩니다.
짧은 봄입니다. 날씨 좋은 날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의 시간을 10분만 가져보세요. 번잡하게 멀리 해외여행을 여행가는 것보다 더 큰 이완의 행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참 자외선은 피부를 상하게 하니 차단제는 바르시고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