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7.13
고현곤/편집국장 대리
그의 말을 들으면서 대략 그림이 그려졌다. 창조경제 주무부처인 미래부는 모처럼 공을 세워보려고 대기업을 달달 볶는 모양이다. 대기업은 썩 내키지 않지만, 정부 눈치 보느라 최대한 성의 표시를 한다. 삼성(대구·경북)과 SK(대전·세종)는 창조센터를 두 곳씩 맡았다. 지자체는 ‘궁한데 웬 떡이냐’는 반응인 듯싶다.
창조센터는 박근혜 정부가 창업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대기업·지자체와 손잡고 시작한 프로젝트다. 대기업이 돈을 대고, 정부가 행정력을 지원해 벤처를 키우는 게 목표다. 지난해 가을 이후 전국에 14곳이 들어섰다. 3곳(서울-CJ, 울산-현대중공업, 인천-한진)은 개소를 준비 중이다. 박 대통령이 개소식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열정을 쏟고 있다.
정부가 창조경제의 돌파구를 창업에서 찾은 건 잘한 일이다. 대졸 이상 노동자는 1000만 명 선인데, 양질의 일자리는 600만 개에 그친다. 대략 400만 개의 일자리가 부족하다. 앞으로도 양질의 일자리가 크게 늘 것 같지 않다. 창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조’하든지 해외로 돈 벌러 나가야 한다. 부럽게도 미국은 새 일자리의 3분의 2가 창업기업에서 나온다.
대기업에 지역을 할당해 창조센터를 만드는 게 관료적 발상이지만, 아무튼 뭐라도 하니 다행이다. 창조경제의 개념을 놓고 왈가왈부하며 시간을 축내는 것보단 낫다. 정부도 그동안 답답했을 것이다. 정부는 2013년 창조경제타운이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는 데 1년을 썼다. 지난해 지자체에 창조센터를 맡겼다가 잘 안 되니 9월부터 대기업을 끼워넣었다. 이래저래 출발이 늦었다.
창조센터가 전시행정이라는 혹평에서 벗어나려면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대기업이 벤처를 육성하는 게 앞뒤가 맞지 않다. 사내 벤처라면 모를까. 대기업은 몸집이 크고 잘 짜여진 조직이다. 반대로 벤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샘솟는 곳이다. 둘은 태생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대기업은 벤처를 도울 준비가 잘 안 돼 있는 것 같다. 오래전에 결정된 투자계획을 창조센터에 끼워넣기도 한다. 대규모 적자로 어려운데 창조센터를 배정받아 전전긍긍하는 곳도 있다. 여기에 중앙정부·지자체가 숟가락을 얹고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벤처가 특유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벤처가 정부와 대기업만 쳐다보기 시작하면 더 이상 벤처가 아니다.
대기업과 벤처가 갑을 관계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당장은 정부의 서슬이 퍼러니 별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감시가 느슨해지거나 정권이 바뀌면 대기업이 벤처의 기술·아이디어를 가로챌 수 있다. 대기업도 새 성장동력을 찾지 못해 고전 중이다. 괜찮은 벤처가 손아귀에 있으면 뺏고 싶은 유혹이 생길 게 틀림없다.
단편적이고 획일적인 정책이나 자금 지원으로는 한계가 있다. 창조센터가 성공하려면 공정한 환경부터 만들어야 한다. 미국에선 대기업이 성공한 벤처를 제값 주고 인수한다. 그 벤처는 매각자금으로 또 다른 도전을 하는 선순환이 자리 잡았다. 이런 풍토에서 애플이나 구글·아마존 같은 거대 기업이 탄생했다. 정부가 할 일이 이런 여건을 만드는 거다. 벤처가 대기업에 치이지 않는 생태계를 만들고, 실패한 기업인이 재기하도록 도와주고, 스톡옵션 세금폭탄을 개선해 벤처에 인재가 모이게끔 하고, 대학에서 창업이 샘솟도록 하고…. 창조센터 말고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널려 있다.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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