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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ㅣ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④ 고무-1

바람아님 2015. 7. 15. 16:01

(출처-조선매거진 2009.12.14 주경철)

[문화ㅣ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④ 고무 

고무산업 눈부신 발전 뒤엔 열대우림과 원주민 피눈물이…

1495년, 콜럼버스가 두 번째로 아메리카에 갔을 때 그는 이스파뇰라섬의 인디언들이 고무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 이 고무공이 어찌나 높이 튀어 오르는지 그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후에도 유럽인들에게는 고무공 놀이가 아주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본국 사람들에게 인디언들의 모습을 직접 보이고 
싶어 한 식민지 관리들은 1531년에 멕시코의 아스테카 인디언들을 스페인 궁전에 데리고 가서 고무공 놀이를 실연해 
보였다. 역시나 처음 보는 인디언들의 모습과 하늘 높이 튀어 오르는 고무공 모두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 

1 실론섬에서 고무 수액을 채취하는 모습. 

서구 열강들은 1900년대 초 아시아로 고무나무를 

이식해 안정되게 고무를 공급받았다. 


2 아마존 지역에서만 자라는 고무나무인 헤베아 

브라질리엔시스의 씨앗. 


3 1897년 드레스를 입고 고무바퀴 자전거를 탄 

여성을 묘사한 광고. 


4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국왕. 식민지 콩고에서의 

고무 채취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 18세기 ‘눈물 흘리는 나무’로 유럽에 소개 

이 이상한 물질의 정체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관찰한 첫 유럽인은 샤를마리 드 라 콩다민이라는 천문·지리학자였다. 
1735년에 그는 남아메리카 정글을 탐험하다가 에콰도르에서 원주민들이 하얀 고무 수액을 모아 연기를 쐰 다음 
여러 다양한 모양의 물건들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유럽에 보고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이 나무를 ‘카우축(caoutchouc)’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눈물 흘리는 나무’라는 뜻이었다. 이 말은 프랑스어에서 고무를 가리키는 말로 그대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18세기에 고무가 연필 지우개로 쓸모가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문질러 지우는 물건’이라는 의미로 
‘러버(rubber)’라고 불렀다. 18세기만 해도 고무는 기껏해야 신기한 고무공이나 지우개 이상의 용도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무의 용도는 무한정 확대되기 시작한다.

18세기 말에 고무가 사용된 특이한 사례 중 하나로 기구(氣球)를 들 수 있다. 프랑스의 몽골피에(Montgolfier) 형제가 
만들었다고 해서 당시에는 ‘몽골피에’라고 불린 기구는 비단에 고무를 입혀서 만들었다. 1783년 베르사유궁전에서 
루이16세가 보는 앞에서 양, 수탉, 오리를 태운 기구가 하늘로 올라갔고, 두 달 뒤에는 용기있는 귀족 한 명이 스스로 
기구를 타고 파리 상공 100m 위로 날아올랐다.


:: 기구·신발·레인코트 등에 응용

19세기에는 고무를 이용한 다양한 제품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고무 덧신 산업이 대표적이다. 
원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고무 수액을 발에 직접 붓는 방식으로 덧신을 만들었는데 이를 응용하여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고무 덧신을 대량으로 만드는 산업이 발전했다. 지난 날 우리가 많이 신던 고무신의 먼 원조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스코틀랜드인인 매킨토시는 천에 고무 수액을 입힌 방수 옷감을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레인코트를 매킨토시 
혹은 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초기 제품들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천연 고무는 기온이 내려가면 딱딱하게 
굳어서 탄성을 잃고 기온이 올라가면 끈적거리는 데다가 역한 냄새가 났다. 그러니 고무 덧신은 바깥의 추운 날씨에서는 
딱딱하게 굳어 발이 아프게 되고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면 끈적끈적하게 녹아서 때로는 벗기 힘들 지경이었다. 
1836~1837년에 불황이 닥치자 인기가 떨어진 뉴잉글랜드의 고무 덧신 산업이 망해서 무려 50만켤레의 덧신이 재고로 
쌓여 있다가 대부분 증기기관차의 연료로 사용되었다. 천연고무의 이런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해결책을 찾아낸 사람은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1800~1860)라는 발명가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높은 기온에서 고무가 풀처럼 녹아버리는 이유는 수분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수분을 없애기 위해 
고무 수지에 여러 물질을 첨가하는 실험을 거듭했다. 수없이 많은 실패 끝에 1839년에 마침내 찾아낸 해결책은 
황가루를 첨가하고 가열하는 소위 가황처리법(vulcanization)이었다. 이렇게 처리된 고무는 온도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강도와 탄성을 유지했다. 이후 고무의 사용 가능성은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그렇지만 정작 굿이어 자신은 발명에만 
성공했지 특허를 확보하는 데는 서툴러서 평생 소송에 시달렸고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다가 결국 빚더미 속에서 
죽었다. 그는 200만달러(현재 가치로는 5000만달러에 상응한다)를 벌었지만 그 돈을 모두 변호사 비용으로 탕진했던 
것이다.

19세기 말에는 그야말로 고무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이 떠오르는 모든 산업마다 고무는 
필수불가결했다. 아무리 훌륭한 기계가 발명되었다고 해도 고무가 없다면 만들기 힘들다. 개스킷이나 팬벨트와 같은 
부품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고무 절연체 없는 전기 기구를 생각해 보라. 산업혁명의 시대에 고무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찾으며, 그래서 가장 시장 상황에 민감한 물질이 되었다.


:: 자전거 이어 자동차 시대의 공신

이 시대에 일반 대중들이 가장 많이 접한 고무 제품은 자전거 바퀴였다. 자전거의 등장은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어디로든 쉽게 돌아다닐 수 있게 만든 자전거는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먼 지역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이 유행했다. 여성들이 바지를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노인네들은 기절하도록 놀랐지만 그만큼 자전거는 여성 권익 향상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문제는 여성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자전거를 쉽게 타야 했는데, 여기에 다소간의 문제가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벨파스트에 사는 수의사인 던롭(John Boyd Dunlop)에게는 7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아이는 자전거를 
타면 페달을 밟느라고 지치는 게 아니라 흔들림 때문에 더 지친다고 불평했다. 당시 자전거 바퀴는 통짜 고무로 된 
것이었는데 이는 충격 완충이 안 좋고 조정이 힘들었다. 던롭은 안이 비도록 만들어서 공기를 채워 넣는 튜브형 
타이어를 발명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자전거가 정말로 널리 보급된 것은 이 타이어가 나온 다음의 일이다.

자전거 다음에는 자동차가 뒤를 이었다. 특히 포드자동차가 대량 생산되는 미국이 자동차의 왕국이 되었다. 
1910년에는 미국에 20만대의 차가 생산되었고 1920년에는 1200만대가 등록되어 있었다. 유럽은 상대적으로 뒤처졌다. 
1900년만 해도 런던에는 말이 끄는 택시와 버스가 수천 대씩 운행되고 있었다. 1914년이 되면서 일부 관광용 마차 
외에는 모두 사라지고 자동차로 대체되었다. 당연히 엄청난 수의 자동차 타이어 수요가 생겨났다. 스코틀랜드의 던롭에 
뒤이어 프랑스의 미슐랭 형제(영어식으로는 흔히 미셰린이라고 발음한다), 이탈리아의 피렐리 등이 자동차 바퀴 개선에 
앞장섰다. 특히 미슐랭 형제는 안쪽 튜브와 바깥쪽 튜브로 이루어진 타이어를 개발했다. 그들은 직접 만든 자동차에 
이 타이어를 장착하고 파리-보르도-파리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하여 100개 가까운 참가 팀 중 7위를 차지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차에서는 엔진 소리 외에 바퀴에서 나는 소음이 없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만큼 자동차의 승차감이 크게 향상된 것이다.

이제 고무 수요는 엄청나게 치솟았다. 고무 수액을 얻을 수 있는 나무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수액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헤베아(Hevea) 속 고무나무, 특히 아마존 지역에서만 자라는 헤베아 브라질리엔시스
(Hevea Brasiliensis)였다. 문제는 이 나무가 헥타르당 3~4그루 정도밖에 없어서 열대우림에서 이 나무를 찾아 수액을 
채취하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현지의 숙련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일해도 10㎏ 남짓 얻는 게 
고작이었다. 이 사업을 주관하는 외지인 사업가, 일명 고무 왕들은 엄청난 돈을 벌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갑부가 
되었지만 현지인 노동자(seringueiros)들은 식량과 채취 도구까지 포함하여 모든 물품을 구입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대개 2년치 임금을 가불받은 상태였으므로 채무노예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하루에 40~50마일씩 
열대우림을 돌아다니며 수액을 채취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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