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9.26)
추석에 권하고 싶은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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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에 대한 예의를 마친 뒤라면, 자신을 충전해도 좋은 시간이다.
이 달콤한 96시간의 가을을 책으로 채우는 것은 어떨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남한강 여행, 전쟁과 소년, 밤을 잊게 하는 미스터리를 키워드로 송호근·안경환·안대회 교수,
미스터리 전문 격월간지 김용언 편집장이 추천한다.
남한강으로 옮겨온 유홍준의 답사 무대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남한강편 |유홍준 지음|창비|1만8000원 |
덕담이나 험담도 어린 자손들에게는 무의미해진 것만 같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놀이도, 텔레비전 프로도 없다.
근래 들어서는 해외여행이 오히려 인기다. 제각기 어떻게 휴일을 넘길까, 궁리에 바쁘다. 실로 공허하다.
민족 전래의 명절 한가위, 이 하루만이라도 '반만년 문화민족'의 전통에 어울릴 만한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같은 유행어를 만들어낸 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같은 유행어를 만들어낸 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한국인의 자부심이 되었다. 북한 땅도, 일본 열도도 그의 부지런한 발길 덕분에 답사기의 무대에 편입됐다.
마치 영화 개봉일이라도 맞추듯 올해 을미년 추석을 앞두고 유홍준이 새 답사기를 펴냈다. 국내 편 8번째 권이다.
이번에는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어머니 같은 남한강' 유역을 답사했다.
"고운님 여의옵고 (중략)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호송했던 왕방연의 시조다.
'단종애사(端宗哀史)'가 깃든 영월 청령포를 떠난 여정은 단양, 제천, 충주, 원주를 거쳐 여주 신륵사에 닿는다.
시·서예·회화·조각 등 풍성한 문화의 잔치가 이어진다.
선인들의 행적이 다채롭다. 퇴계 이황과 기녀 두향의 애틋한 정사(情絲)에 얽힌 설화도 그중 하나다.
이번 책에는 유난히 그림이 많다. 조선 시대 회화사가 '전공'이라는 저자의 배려다. 옛 문헌과 일화만이 아니다.
'남한강의 시인' 신경림의 시 네 편이 풍광에 녹아 있다. 4·19의 시인, 신동문의 절필 시 '내 노동으로'도 담겨 있다.
글쟁이들의 '황성옛터'인 정호승의 시가 애조(哀調)를 더한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廢寺地)처럼 산다."(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그뿐이랴. 신세대 재간둥이인 방송인 김제동과 '모태 미인' 탤런트 김태희가 '청풍 김씨'라는 책 속의 발견이 재롱스럽다.
그뿐이랴. 신세대 재간둥이인 방송인 김제동과 '모태 미인' 탤런트 김태희가 '청풍 김씨'라는 책 속의 발견이 재롱스럽다.
문화재청장 재임 시절의 체험담도 거북살스럽지 않다. 외국인 여행객을 위해 모범 코스를 덧붙인 친절도 살갑다.
'행유여력(行有餘力)'이면 유홍준의 다음 '벼슬'은 관광공사 사장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유홍준의 글이 달라졌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친절해졌다. 한때 강고(强固)를 넘어 일편 생경하기도 했던 필봉이
유홍준의 글이 달라졌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친절해졌다. 한때 강고(强固)를 넘어 일편 생경하기도 했던 필봉이
어느 틈엔가 둥글어졌다. 유머에도 독성이 있던 가시가 걸러졌다. 나이도 웬만하지만 나이보다도 더 '어른'이 된 것 같다.
자신의 숙성을 스스로 대견히 여기는 듯한 자술이다. 저자의 만보완상(漫步玩賞)에 동참한 명사 문화유객(文化遊客)들의
훈수 객담도 별미다. 책을 들고 선뜻 길을 나서기 어려운 형편의 독자는 안방에서 책을 벗 삼아 느긋이 와유(臥遊)할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한국인의 특전이다.
잃어버린 고향, 유일한 집은 어머니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 어머니|강상중 지음|오근영 옮김| 사계절|1만1000원 834-ㄱ246ㅇ / 위치 : [강서]문학실 |
추석 달빛엔 아무래도 어머니가 어른거린다. 오래된 마음의 습관일 거다.
며칠 전 모 대학 강연을 끝내고 그 근처 어린 시절 기억이 있는 골목을 걸었다.
사실 그걸로 올 추석 의례를 마치려던 심사도 있었다. 꼬불꼬불한 그 미로들은 서울을 초현대식 도시로 바꿔버린 개발붐을
용케도 피해 있었다. 늦은 밤, 전봇대에 매달린 백열전등이 기억을 탐사하는 나를 맞았다.
흐릿한 기억 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앉아 있다. 추석 달빛이 흔들리면 또 어쩔 수 없을 거다.
환갑을 훌쩍 넘긴 강상중 교수가 화해하고 싶었던 그 기억처럼 말이다.
지난겨울, 도쿄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세이가쿠인(聖學院)대학에서 그를 만났다.
초로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이 맑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논리를 접었다. 그는 정치학을 접었고, 나는 사회학을 접었다.
'이중 고립' 속에 살아왔던 그의 삶의 궤적에 접선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이 오랫동안 앓아왔던 지리적 고립, 그 속에 자이니치(조선인 2세)로 성장했던 인종적 고립을 얘기했다.
나는 구태여 그의 자전적 소설 '어머니'를 들먹이지는 않았지만, 상실된 고향을 찾는 그의 지적 여정엔 조선 여인 우순남이
어른거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디아스포라의 기원이 진해 출신 순박한 처녀, 그녀였음으로.
정박하지 못하는 지식인 강상중의 삶이 유일하게 닻을 내릴 수 있는 곳이 어머니였다.
식민과 태평양전쟁 그리고 일본의 배타적 인종주의를 견딘 어머니라는 그 기항지가 결코 순탄하지 않았기에 강상중의
인식도 자유부동적이다. 주변인의 시선이 중심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음을 깨달은 청년 나가노 데쓰오(氷野鐵男)가
강상중이란 조선 이름을 회복한 저간의 고뇌를 어렴풋이 짐작하는 어머니에게도 기항지가 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진해.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30년 만에 찾은 고향에서 초로의 여인 우순남은 '고향의 봄'을 불렀다.
'고향'이 '고향 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곧 자신에게서 재현될 것임을 예감하면서 말이다.
구마모토에서 고물상 나가노상점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묻고, 결국 어머니를 묻었다.
2005년 봄, 그는 아들과 함께 진해 앞바다에 와 있었다.
역사는 이런 작은 개별적 기억 조각들이 모여 흐르는 대하(大河)다.
역사는 이런 작은 개별적 기억 조각들이 모여 흐르는 대하(大河)다.
어머니로부터 발원된 운명의 끈은 그 대하가 혹시 새로운 길을 뚫는다면 바뀔지도 모른다.
아들과 함께 언덕에 오른 강상중의 마음엔 그런 생각이 고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유언이 그랬다.
"아버지나 나나 우리 시대 사람들은 응어리가 남아 있지. 그런 건 앞으로는 없어질 거라 생각한다…
데쓰오, 이 어미는 행복했다."
필자도 지난달 식민과 전쟁과 산업시대를 뚫고 온 아버지를 묻었다. 30년 전 고향 산비탈에 묻었던 어머니와 함께 20세기 부모의 스토리가 막을 내렸다. 올 추석 달빛은 기어이 홀가분할 것이다.
필자도 지난달 식민과 전쟁과 산업시대를 뚫고 온 아버지를 묻었다. 30년 전 고향 산비탈에 묻었던 어머니와 함께 20세기 부모의 스토리가 막을 내렸다. 올 추석 달빛은 기어이 홀가분할 것이다.
소년이 본 현실 속에 아름다움은 없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민음사|1만3000원 |
지난여름에 이탈로 칼비노 전집을 샀다. 저명한 현대 작가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
작가에 대한 호평을 여기저기서 들었고, 작고 예쁜 장정이 마음을 움직였다.
또 집을 떠나 차 속이나 숙소에서 읽기가 좋을 정도로 분량이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또 집을 떠나 차 속이나 숙소에서 읽기가 좋을 정도로 분량이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일이 년 사이에 외국 소설을 등한시한 느낌이 들어서 대뜸 전집을 구해 천천히 읽기로 했다.
소설에 한번 빠지면 만사 제쳐놓고 읽는 버릇이라 너무 깊이 몰입하지 않도록 적당히 재미있는 것도 필요하다.
칼비노의 첫 번째 장편소설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은 그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주었다.
지방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읽었는데 아쉽게도 예상보다 더 빨리 읽어버렸다.
배경은 세계 2차대전 말기 파시스트들이 장악한 이탈리아 어느 동네다.
배경은 세계 2차대전 말기 파시스트들이 장악한 이탈리아 어느 동네다.
동네의 꼬마 악동 핀은 매춘부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핀은 같은 또래와는 어울리지 못하는 애늙은이이고, 골목 선술집 어른들 틈에 낀 천덕꾸러기이다.
어느 세계에도 끼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어른들 세계에 끼고 싶어 핀은 누나를 찾아온 독일 군인의 권총을 훔치고, 그만이 알고 있는 비밀 장소인 오솔길에 있는
어른들 세계에 끼고 싶어 핀은 누나를 찾아온 독일 군인의 권총을 훔치고, 그만이 알고 있는 비밀 장소인 오솔길에 있는
거미집에 감춘다. 그러나 독일군에 잡혀 감옥에 갇히고 다시 그곳을 탈출하여 산속 레지스탕스 부대에 가담한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는 어른의 주변을 맴돌 뿐, 부대가 독일군과 싸우러 간 사이 그가 살던 동네로 다시 돌아온다.
다행히 이 소설은 뻔하고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다루지 않는다.
전쟁은 정면으로 다뤄지지 않고 핀의 눈에 비쳐 조금 막연하고 무감각하게 비껴 있다.
가끔 등장하는 폭격과 죽음조차 아이들 장난이나 놀이와 같다.
핀이 볼 때 전시의 사회와 인간은 진정성도 어른다움도 없다.
핀이 볼 때 전시의 사회와 인간은 진정성도 어른다움도 없다.
정의의 이름 아래 모인 군인들은 그가 겪어본 바로는 아픔과 애욕과 도피와 허영의 인간에 불과하다.
그 세계는 그가 떠나온 동네와 아무런 다름이 없다.
그 점을 확인한 순간 그는 달아났고 "그에겐 외로움만이 남아 있었다."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여 들어가고자 했던 어른의 세계란 결국 환영이다.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여 들어가고자 했던 어른의 세계란 결국 환영이다.
조금 맛본 그 세계는 굳이 들어가고자 염원할 곳은 아니다.
권총을 숨겼던 그의 거미집이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졌듯이 그의 외로운 꿈은 전쟁과 그 와중에 언뜻 체험한 인간 현실에
의해 사라졌다. 핀의 꿈과 실망은 모든 소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은 이념이 과잉된 시대에서 인간 속성을 포착한 흥미로운 우화이다.
소설은 이념이 과잉된 시대에서 인간 속성을 포착한 흥미로운 우화이다.
그 속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늘 생생한 모습을 드러내므로 시대를 초월한 우화이다.
작품을 읽고 나니 또 다른 그의 소설을 곧 손에 잡아야겠다.
이번에 잡을 책은'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다.
스티븐 킹의 유혹을 어찌 뿌리치나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 | 11/22/63|스티븐 킹 지음|이은선 옮김| 황금가지|1권 1만3500원, 2권 1만5800원 |
스티븐 킹이 첫 번째 '순수한'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미스터 메르세데스'로 올해 에드거 상을 거머쥐었을 때,
그가 지금껏 호러와 판타지의 제왕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들은 "킹이 미스터리까지 잘 쓰다니!"라며 감탄했었다.
하지만 그의 전작 '11/22/63'의 야심은 더 거대했다. 무려 1260쪽에 달하는 이 장편소설은 시간 여행을 다루는 SF,
대체 역사물, 가슴 떨리는 로맨스, 끔찍한 악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호러, 주인공의 임무를 막는 악의 정체를 파헤치는
미스터리까지 모든 측면을 완벽하게 만족시킨다.
평범한 영어교사 제이크는 친구 앨로부터 놀라운 비밀을 듣는다.
평범한 영어교사 제이크는 친구 앨로부터 놀라운 비밀을 듣는다.
앨이 운영하는 식당의 창고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여행의 입구라는 것이다.
단, 시간여행 종착지의 날짜는 언제나 1958년 9월 9일이다. 앨은 '분수령'이라는 단어를 상기시키며,
미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버릴 수 있는 임무를 제안한다.
미국인이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날,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리 오즈월드의 총알에 맞아
미국인이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날,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리 오즈월드의 총알에 맞아
숨졌던 그날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제이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건 정의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얼마 전 알게 된 학교 수위 해리의 불행한 가족사에 크게 마음이 흔들렸고,
과거로 돌아가 가정을 파괴한 '나쁜' 아버지를 막아 해리의 미래를 좀 더 행복하게 바꾸길 원했다.
하지만 제이크가 1958년 9월 9일로 돌아간 순간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평화롭게 박제된 이미지로만 보았던 과거는 기실, 아내와 아이와 여타의 소수자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로 가득한 지옥이었다. 그리고 시간 여행물에서 언제나 등장하듯, 곧장 '역사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미 한 번 거쳐온 역사의 방향을 바꾸려는 순간 그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래서 제이크가 리 오즈월드를 저지하는가'라는 결정적인 순간을 누설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스티븐 킹이 시간 여행자의 싸움의 공식을 어떤 식으로 비틀고 확장시키는지를 조금 더 떠들고 싶을 뿐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다른 나라의 태풍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그 태풍이 오지 않았더라면 어떤 참사가 닥쳤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해리의 아버지, 혹은 리 오즈월드라는 '나비'를 없앤다면 이후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순진한 의도가
어떤 현실과 마주치게 되는지, 70세의 스티븐 킹은 결말에 이르러 냉정한 실리주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개인에게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낙관주의를 모두 거머쥔다.
미국이 가장 젊고 행복했던 시절인 1963년과, 9·11과 2008년 금융위기까지 겪었던 상처투성이의 현재를 비교했을 때,
그는 결코 현재를 비관하거나 깎아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참혹한 과거를 통해서 더 나은 미래를 견주고 꿈꾸며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격려한다. '11/22/63'은 미국에 바치는 스티븐 킹의 위대한 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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