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책·BOOK

"살육이 아니라 '노동'을 했을 뿐이다"

바람아님 2015. 10. 18. 08:32

(출처-조선일보 2015.10.17 어수웅 블로그문화부 차장)

美·英 도청자료 10만 쪽 발굴… 나치 병사의 심리 10년간 연구
전쟁 '프레임'에 갇힌 일반인들, 집단 이념 속에 狂氣 나타나… 누구라도 惡으로 변할 수 있어

나치의 병사들|죙케 나이첼·하랄트 벨처 지음|

김태희 옮김|민음사|577쪽|3만2000원

"전쟁 둘째 날에 철도역에 폭탄을 투하했어요. 열여섯 발 중 여덟 발이 도시 안으로 떨어졌지요. 
집들 한가운데로요. 즐겁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셋째 날에는 아무려면 어떠냐는 심정이 되었고, 
넷째 날에는 즐거워졌어요. 
아침의 식전 오락 같은 거였지요."(1940년 4월 30일, 독일 공군장교 폴 소위)

런던 정경대학 국제사학과 학과장인 죙케 나이첼 교수는 2001년 영국 런던의 국립보존기록관에서 
노끈 하나로 묶은 800쪽짜리 서류 뭉치를 찾아냈다. 
1943년 9월 U-보트에 탔던 독일 병사들이 나눈 대화를 영국군이 도청(盜聽)한 기록이었다. 
흥분한 그는 8월과 10월의 자료도 신청했다. 놀랍게도, 모두 있었다. 
나이첼 교수는 내친김에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립기록관리처의 자료도 뒤져 찾아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독일과 이탈리아 병사의 대화를 미군이 도청한 자료였다. 
역사학자는 이 자료에 대한 역사학 너머의 해석을 포함하기로 결심했다. 
독일 괴테 인스티튜트가 '학문의 얼굴들'로 선정한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 교수에게 SOS를 보낸 것. 
역사학자와 사회심리학자는 의기투합했고, 10년 넘는 연구 끝에 나치 병사의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에 대한 시각과 해석을 
정리했다. 이 책의 부제는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명제에 
대한 학문적 증명이면서, 전쟁이 나기 전에는 평범한 목수, 회계사, 농부였던 이들이 어떻게 이런 '괴물'이 되었는가에 
대한 실증적 분석이기도 하다.

나이첼 교수가 발굴한 자료의 중요성은 독일 병사들의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기존 수사 기록이나 군사 우편, 
증언록, 회고록은 모두 '의식적'으로 쓴 기록이며, 결국 그들의 체험과 관점을 사후에 덧칠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수용소의 포로들은 '실시간'으로 '가감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

당연히 이 기록에는 총살과 강간과 약탈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놀랍게도 그 만행(蠻行) 사이에 끼어 있는 대화는 늘 일상의 
평범한 삶이 소재다. 15세 러시아 군악대 소년병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총살시킨 기억을 이야기하는 독일 병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러시아 음악의 아름다움과 소년병사의 장난끼를 동시에 전달한다.

2차대전 당시 아동용 가스 마스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테스트하는 장면. 뒤의 여성이 어머니인지 간호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악은 평범했다. 성실한 회계사는 전쟁 발발 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사진은 2차대전 당시 아동용 가스 마스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테스트하는 장면. 뒤의 여성이 어머니인지 간호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민음사 제공
10만 쪽, 10년 연구를 통한 두 교수의 결론은 '프레임'으로 요약된다. 
주지하다시피 프레임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유대인종 증오나, 국가 우선의 나치 이데올로기에서 나치 만행의 원인을 포착했던 기존의 견해와 달리, 이 비이성적 행위의 
주 원인은 '전쟁' 그 자체의 특수한 프레임이었다는 분석이다. 
70년 뒤의 우리에게는 당연히 충격적이지만, 놀랍게도 이 병사들의 대화에서는 거의 한 번도 논쟁이나 도덕적 반박이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화기애애하기까지 하다. 
당시 독일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가치"자신의 임무가 무엇이든 제대로 완수하는 것"이었다. 
민간인일 때 훌륭한 회계사, 농부, 목수였던 것처럼, 스탈린그라드에서 공병으로서도 잘 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두 교수는 전쟁이 터졌다고 해서 반드시 살인을 위한 근본적인 심리 개조나 자기 극복, 사회화 등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맥락만 바뀔 뿐 어차피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 
이들은 나치 병사들이 전쟁을 '전쟁'이라는 프레임으로 본 것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프레임으로 봤다고 해석한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거대한 이념이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인간의 행동은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역할,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두 학자의 견해다.

'나치의 병사들'은 전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처음부터 뒤흔들며 확장시킨다. 
나치 병사들은 거대한 섬멸 기계의 일부였고, 따라서 유례없는 집단 범죄의 집행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담자이기는 
했다는 것이 기존의 지배적 견해였다. 
자칫 '내재적 접근법'으로 가해자의 살육과 광기를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이 책의 근본적 교훈은 '프레임 너머'에 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누구든지 '악'의 일부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 중요한 것은 전쟁 자체가 발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교훈과 깨달음이 70년 전 나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이념과 진영의 프레임에 갇혀, 자기편의 대의명분만 동어반복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대한 경고로 읽는다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