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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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논설위원
신이 죽은 니체의 세계에서 인간은 ‘초인’으로 거듭나야 했다. 니체는 그것을 알리러 온 예언자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도중에 있는 것도,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오늘날 유럽의 대표적 사상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니체의 밧줄을 이루고 있는 재료가 바로 ‘역사’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역사의 실을 꼬아 밧줄을 만드는 행위를 사람들의 ‘집단 기억’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빗댄다. 밧줄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기둥에 묶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둥을 선택하는 사람은 실이 아니라 밧줄을 만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흔히 자기실현적 예언(원래 거짓된 생각을 참된 것으로 이해되도록 만드는 현상)을 이용해 역사적 기억을 자기들의 우군으로 만든다.
딱 2015년 대한민국의 상황이 그렇다. 바우만의 설명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역사를 저 보이는 대로 쓰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것만을 아이들의 교과서에 담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택한 기둥에 묶인 역사의 밧줄 위에 서 있다. 건너가지도 못하고 뒤돌아보며 벌벌 떨고 있다.
밧줄 한가운데에는 그 밧줄을 꼰 사람들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있다. 권력자의 의지를 무조건 수용하고 뒤늦게 의원총회를 열어 당론을 강요하고 포장하는 여당과, 이런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친일’ ‘유신’ 같은 입맛 맞는 용어들로 프레임 전쟁의 깃발부터 들고 보는 야당이 그들이다. 그들에게 역사는 이미 형성된 권력이건 형성 중인 권력이건 그걸 쥔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재편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발터 베냐민이 그랬던가. “역사는 언제나 승자들에 의해 쓰여지고 관찰자의 관점에서 고쳐진다”고.
하지만 다시 말해 역사는 죽었다. 이탈리아 사회학자 카를로 보르도니는 바우만과 함께 쓴 『위기의 국가』란 책에서 “오늘날 승자들이 자기에게 유리한 역사를 갖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정보 유통 속도가 빨라져 “모두가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역사는 이제 뉴스가 됐다”고까지 그는 말한다. “전체는 보지 못한 채 화제성과 생생함만 있을 뿐 파편화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이미지가 제공되면서 빠르게 잊히고 다음 뉴스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식민지 여성들을 침략군 병사들의 사기진작용 제물로 바친 역사를 선택적 망각으로 지우고, 수많은 사진기록물이 남아 있는 대학살의 역사를 돈으로 덮으려 하는 이웃나라 우파 정권의 행태를 볼 때 참으로 돋보이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역사나 우리 역사나 다를 게 없다.
그러니까 내 말은 솔직해지자는 거다. 다 알지 않는가. 이 나라 근·현대사에는 보수와 진보 양쪽 진영에서 그토록 돋보이려고 애쓰는 모든 게 다 있는 게 사실이다. 친일도 있고 항일도 있으며, 성장도 있고 독재도 있다. 건국도 있고 북한도 있다. 자랑스러워도 우리 역사며 부끄러워도 우리 역사인 것이다. 고르고 빼낸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역사는 죽었단 말이다. 죽은 역사는 어떤 식으로도 내 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의 역사는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걸 어떤 모습으로 만드느냐는 지금 우리 하기에 달렸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다리이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말이 다른 게 아니다. 지난 역사 뒤집기 말고도 지금 우리가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뒤돌아 해찰할 틈이 없는 까닭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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