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살며 생각하며>도깨비하고 함께 산다

바람아님 2015. 12. 5. 00:33
문화일보 2015-12-4

한승원 / 소설가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나는 나의 토굴에서 음험한 내 사랑하는 도깨비 한 놈하고 산다. 나의 눈에만 보일 뿐인 투명한 이놈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관여하고 간섭을 한다.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곤 하는 이놈은 나의 철없던 젊은 시절의 자존심만 빵빵하던 나를 극성스럽게 본떠 행동한다. 보라색의 둘레가 높은 중절모자를 쓰고, 오래 입어서 소매 끝이 닳은 진한 벽돌색의 양복저고리에 검정 바지를 입고 가죽이 부드러운 밤색의 나룻배처럼 큰 구두를 신는다. 살찐 통마늘 같은 코에 쌍꺼풀 눈매에, 눈썹밭이 넓고 까맣고, 자잘하고 눌눌한 옥니가 드문드문하고 머리칼이 반백인 이놈의 모습은 내 눈에는 보이지만, 나 이외의 어떤 사람 눈에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다. 모습만이 아니고, 목소리도 투명하고 체취도 없어, 나의 아내도 이놈의 존재를 느끼지도 알아채지도 못한다. 이놈은 길 잘 든 애완동물처럼 나를 따르면서 내 행동을 흉내 내는데, 내가 이놈과 말을 주고받으면 아내는 내 목소리만 듣고서, 혼자 뭔 말을 그렇게 중얼중얼해 쌓느냐고 지청구를 한다.


이놈은 차탁 앞에 마주 앉은 젊은 여자 손님의 짧은 청치마 속에 담긴 어둠과 풍만한 유방과 쇄골과 목덜미와 도톰한 입술을 엄숙한 마음으로 응시하고 거기에서 기(氣)를 얻어 싱싱해지라고 귀띔한다. 외롭더라도 어느 누구에게든지 전화질을 하지 말고 책을 읽고 시와 소설만 쓰라고 하고, 자기하고만 속을 트고 살자고 하고, 섹시한 여가수 셀린 디옹이나 세라 브라이트먼의 시디를 오디오에 넣어 틀고 자기와 더불어 춤을 추자고 한다. 세상으로부터 유배를 당한 듯 우울해지면 나는 서슴없이 이놈과 더불어 막춤을 춘다.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콥스키를 틀어놓고 두 팔을 휘둘러 미친 듯 지휘를 하기도 한다.


이놈은 무슨 도사라도 된 듯이 잔디밭에 내린 아침 이슬방울에서 ‘만다라’를 읽으라 하고, 늙은 감나무 그늘에 앉아 다산성인 늙은 그녀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으라 하고, 산책길에 길 가장자리의 들꽃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하고, 흘러가는 구름 위에 올라타라고 하고, 바람처럼 자유자재로 살랑거리며 살라고 한다.


나의 사랑하는 도깨비에게는 족보가 있다. 이놈은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우리 집안 어른들과 충직하게 사귀어 왔다. 우리 선대 할아버지와 이놈의 선대 할아버지는 밤 낚싯배에서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세교(世交)이다.


선대의 할아버지가 밤낚시질을 갔는데, 다른 날 밤과 달리 고기들이 입질을 잘했다. 한 마리 잡고 나면 또 한 마리가 입질을 하고, 그놈을 잡아 올리고 나면 또다시 입질을 했다. 아흔아홉 마리쯤 잡았다고 생각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옆구리가 결려 허리를 폈다. 그런데 고기 구럭 안을 들여다보니 고기가 단 한 마리뿐이었다. 깜짝 놀라 사방을 살피는데 뱃머리에서 시꺼먼 도깨비가 히히히 웃었다. 할아버지는 도깨비한테 우롱을 당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도깨비는 이때껏 할아버지가 낚시를 드리우면 구럭 안의 고기를 슬쩍 집어다가 낚싯바늘에 꿰어주곤 한 것이다. 화가 난 할아버지가 너 이놈 나한테 죽어봐라 하고 덤비니 도깨비가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마라, 그동안 행복했지 않으냐, 한 마리나 아흔아홉 마리나 그것이 그것이니라.”

할아버지는 도깨비의 말에 크게 깨닫고 그 도깨비와 사귀기 시작했고 그 사귐은 나에게까지 이르렀다.


20여 년 전, 서울에서 낙향하여 토굴을 짓고 집들이를 한 날 한밤중에, 나의 사랑하는 도깨비는 자기만의 알 수 없는 시공을 휭 다녀와서 말했었다.

“우리 거래를 하세.” 이놈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무슨 거래?”

“파우스트도 말년에 악마하고, 죽은 다음 영혼을 주기로 하고, 젊음을 새로이 받는 거래를 했지 않은가? 자네도 우리 도깨비나라 은행에 자네 영혼을 담보하고, 돈을 무진장으로 대출받아다가 토굴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자잘한 섬들, 그 너머 고흥반도, 그 위로 떠오르는 달과 해, 가을 풀밭의 들꽃 같은 밤하늘의 별들, 바다와 들에 끼는 안개, 흐르는 구름, 부는 바람, 초혼된 넋처럼 내리는 하얀 눈송이들, 물새들, 퍼덕거리는 물고기들, 농토를 보듬고 사는 농부들,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부들, 두루미, 해오라기, 먹황새, 도요새, 물떼새, 갈대밭에 둥지를 틀고 사는 개개비, 뒷산에서 우는 꿩과 뻐꾸기, 가을밤에 부엉부엉 우는 수리부엉이…. 모든 것을 다 사 가지고 주인 노릇을 하고 살게나. 세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받지 말고 그냥 무료로 대여해주는 마음 넉넉한 주인 노릇 말이네.”


이놈의 뜬금없지만 의미심장한 제안에 황홀해진 내가 “그래 좋네” 하자, 이놈이 “조건이 있네” 하고 말했다. 내가 무슨 조건이냐니까 이놈은 “이제부터는 그 어떤 것에도 한눈팔지 않고, 이 토굴 안에 자네를 가둔 채 이때껏 읽지 못한 책들을 읽어내고, 시나 소설을 쓰는 일에만 팍 미쳐버린다는 조건이네” 하고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그렇지 않아도 바람벽에 ‘광기’라고 써놓고 사는 처지라, 내가 흔쾌히 그 조건대로 하겠다고 했으므로, 우리의 흥정은 곧바로 이루어졌고, 도깨비가 대출해 준 어마어마한 돈으로 토굴에서 보이는 모든 우주 전체를 사버렸고, 나는 이 세상 최고의 부자, 우주의 주인이 되었다. 내가 그런 영광을 누린 대신, 나 죽으면 내 영혼을 내 사랑하는 도깨비가 챙겨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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