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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영화 같은 삶은 없다

바람아님 2015. 12. 7. 10:30

(출처-조선일보 2015.12.07 정의석 인제대 상계백병원 흉부외과 교수)


정의석 인제대 상계백병원 흉부외과 교수환자가 나빠졌다. 혈관에서 피가 솟구친다. 집도의는 피를 뒤집어썼고 패닉 상태다. 
혈압은 떨어지고 환자의 숨은 꺼져 간다.

그 순간, 누군가 육중한 수술장 문을 열고 들어와 수술 장갑을 손에 끼며 말한다. 
"이 수술은 내가 한다!"

신의 손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 것이다. 긴박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는 비장하게 메스를 든다. 
출혈이 멈추고 환자의 혈압은 정상으로 돌아온다. 모두가 그를 우러러본다. 
이것은 물론 현실이 아니다. 흔한 영화의 한 장면이다.

1989년 발매된 전인권의 앨범에는 '언제나 영화처럼'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언제나 영화처럼, 멋있는 영화처럼"이란 가사가 전곡에 반복된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영화와 같은 멋진 삶이란 정말 존재할까.

현실은 영화보다 녹록지 않다. 신의 손이 등장한다 해도, 어려운 수술은 어려운 수술일 뿐이다. 
솟구쳐 나오는 피를 의사의 자신감만 가지고 막을 수는 없다. 
긴 시간 혈투를 벌이고 며칠 동안 묵묵히 환자 옆을 지켜도 환자는 나빠지곤 한다. 그뿐 아니다. 
영화 속에서처럼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스르르 눈을 감는 죽음도 현실에서 흔하지 않다. 
고독하고 두렵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임종 과정이 우리 모두를 기다린다.

[일사일언] 영화 같은 삶은 없다
현실은 현실이다. 범인을 잡으려면 형사들은 지루하게 잠복해야 한다. 수퍼히어로가 나타나 도와줄 확률은 0%다. 
연인의 자동차를 타고 한겨울 한강 둔치를 찾았다가 싸우고 헤어진다면 얼어붙은 강바람에 부들부들 떨며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갈 각오도 해야 한다. 
짙은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잠들었다가는 다음 날 피부과로 뛰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  주 드라마틱한 삶을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내 자리를 지키기도 막막하다. 
멋있는 영화처럼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극장에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불이 켜지고 관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모두 각자의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묵묵히, 천천히 견뎌내며 살아간다. 
멋지지도 않고 수퍼히어로도 없지만 섬세하고 세밀한 일상. 
그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