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1.17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김대식의 북스토리] 과거는 잊혀져야 하는가
로마 병사들과 관료들은 이미 떠났지만 중앙 왕정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시절.
지금은 “잉글랜드”라 불리는 섬의 주인 브리튼 족과 침략자 “영국인들”
(anglo-saxon). 수 십 년간의 전쟁과 학살과 복수.
죽은 어머니의 아들은 어머니를 죽인 남자를 죽이고, 그는 남자의 아들에게 살인 당한다.
브리튼인과 영국인들 간의 “영원한 평화”라던 휴전을 깨고 영국인 여자와 아이들을
학살한 아서 왕은 생각한다: 이번의 승리가 또 다시 새로운 전쟁과 살육으로
반복돼서는 안된다고. 코에서 숨을 쉴 때마다 뿜어내는 안개가 기억을 잊게 한다는
전설의 용 “크베릭”. 아서 왕의 마술사 멀린은 크베릭을 길들여 깊은 계곡에서
망각의 안개를 뿜어내도록 한다……
그리고 먼 훗날. 평화로운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는 브리튼 족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
힘들지만 불만스럽지 않은 단순한 농부의 삶. 하지만 그들은 어제 있었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만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도, 옆 마을 영국인들도
망각의 늪에 빠진 삶을 살고 있다. 아니, 영국인, 브리튼인 모두 과거를 기억할 수
없기에 더 이상 복수도, 학살도 불가능한 것이다.
망각을 통해 학살의 과거를 잊게 하려던 아서 왕의 계획은 성공한 것일까?
젊은 시절 아서 왕을 위해 싸우던 액슬. 더 이상 과거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하나만은 기억할 수 있었다. 바로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아들이 어디선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해 노부부는 길을 떠난다.
용을 죽이려는 영국인 윈스턴 경과 용을 지키려는 브리튼 족 가웨인 경. 그들을 만난 노부부는 서서히 진실을 알게 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인생. 추한 과거가 더 추한 미래의 씨앗이 되지 못하도록 계획된 것이었다고.
하지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랑도, 미움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미움도, 사랑도 무의미하다.
용이 더 이상 망각의 안개를 뿜어내지 않는 순간 또다시 영국인과 브리튼 족간의 전쟁과
학살이 시작될 거라는 가웨인 경의 예언을 무시하고 노부부는 윈스턴 경을 돕는다.
용은 죽고 망각의 안개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부부는 드디어 기억한다.
사랑하는 아들은 이미 먼 옛날 죽었다고. 그리고 노부부는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이제 다시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반복될 것이라고.
과거의 죄는 용서해야 할까?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위안부들의 기억은 이제 잊혀 져야
할까? 역사 깊은 곳에 파묻혀 있는 전쟁과 복수의 거인을 다시 파내는 것은 현명한 일일까?
“남아있는 나날”과 “위로 받지 못한 사람들”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출신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그가 10년만에 발표한 신작 “파묻힌 거인”이
던지는 질문들이다.
물론 중요한 질문들이다. 하지만 하필 일본 출신 작가가 제시한 과거에 대한
너그러움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 파묻힌 거인 | 시공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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