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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나처럼 엉뚱하고 키우기 어려운 딸 있을까

바람아님 2016. 2. 12. 00:25
중앙일보 2016-2-6

“우리 딸도 한비야씨처럼 키우고 싶어요.” 어제 했던 특강 후 30대 학부모가 한 말이다. 이럴 때마다 뜨끔하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나 같은 딸, 두 명은 못 키운다고 하실 게 분명하다. 그렇다. 나는 키우기 어려운 딸이었다. 성격 밝고 심부름 잘하고 사람들하고 금방 친해지는 좋은 면도 있긴 하지만 엉뚱한 짓을 하는 게 늘 문제였다. 3녀1남 중 셋째인 나는 어릴 때부터 햇살 좋은 겨울이면 맨다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돌아다녔고, 꽁꽁 언 수돗가에서 시간만 나면 얼음을 깨고 놀다 손가락마다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동네 아이들을 꼬드겨 먼 곳까지 갔다가 길을 잃어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했고, 커다란 드럼통 안에 숨어 술래를 기다리다 잠드는 바람에 아이가 없어졌다고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세계시민학교 교장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세계시민학교 교장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철이 좀 든 때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혼자 되어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는 엄마를 기쁘게 해줄 방법을 연구하다 공부 잘하는 게 제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엄마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우리 셋째가 이번에 전교에서 몇 등 했다고 뻐길 수 있게 해드렸다. 그런데 정작 대학 입학 시험에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후기 대학은 원서도 넣지 않았다. “엄마, 나 대학 안 갈래.” 엄마 대답은 딱 한마디. “그래.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다가 6년 만에 “엄마, 나 대학 갈래” 하니까 그때도 딱 한마디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온갖 허드레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공부와 담쌓고 사는 내가 얼마나 걱정되고 속상했을까? 잔소리는 또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엄마는 두 번 다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때만이 아니다. 서른 살 되던 해, 엄마와 나는 신사협정을 맺었다. 앞으로 엄마는 내게 선을 보라거나 결혼 얘기를 일절 하지 않기로, 대신 결혼할 사람은 내가 알아서 찾아오기로. 그 후 엄마는 한 번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걱정도 기도도 세게 하셨지만 시시때때로 엄마의 낯빛이나 눈빛에 나타나는 안타까움과 조바심을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그것도 모자라 서른세 살에 시집은커녕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가겠다는데도 엄마는 딱 한마디 하셨다. “너를 누가 말리겠니?” 나중에 물어보니 내가 어릴 때부터 꼭 세계일주 할 거라고 했기 때문에 ‘올 것이 왔구나’라고만 생각했지 그 여행이 6년이나 걸리고 오지로 혼자서 다니는지는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라는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꿈에도 몰랐단다.


엄마가 걱정하는 줄 뻔히 알지만 여행 중에는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았다. 비싼 전화값 때문이었다. 내 여행경비는 하루 평균 10달러였는데, 국제전화는 최소한 20달러가 들었다. 그것도 오지에선 불가능하고 도시 우체국에서 줄을 길게 서서 기다렸다가 연결 상태 불량한 전화통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했다. 기본 통화료 통화시간은 3분. 몇 달 만에 큰마음 먹고 한 전화를 엄마가 받으면 첫마디는 늘 “니 어디고?”, 그러고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게 안도의 눈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 번번이 짜증을 냈다. “엄마아아아, 이 전화 얼마나 비싼 건데, 울려면 다른 사람 바꿔 줘요. 시간 없어, 빨리빨리….” 20달러면 2만원 남짓, 겨우 그 돈 아끼느라 엄마 눈에 눈물 나게 하고 그렇게 간을 졸이게 했던 거다.


세계여행이 끝날 때쯤 엄마한테 큰소리쳤다. 다 끝나면 엄마 가고 싶은 곳에 단 둘이 가자고. 엄마가 제일 가고 싶은 곳은 겨우(!) 일본이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이 끝나고 나니 책 쓰랴, 방송하랴, 국토종단하랴 생각보다 훨씬 바빴다. 엄마와의 여행도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때마다 엄마는 “괜찮아. 당연히 바쁜 일부터 해야지”라고 하셨고, 나 역시 엄마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는데도 한두 달 늦어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국토종단을 끝내고 책을 쓰던 중 엄마가 돌아가셨다. 임종 직전에 엄마가 작은 소리로 비야야, 하고 날 다정하게 불렀다. 그러고는 몇 번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잠시 후에 평안히 떠나셨다. 마지막 가는 길,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을까? 항상 아슬아슬하게 사는 딸에게 남기는 당부의 말이었을 거다.


아,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이 휴대전화로 엄마랑 딱 3분만 통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있다면 20달러가 아니라 2000달러라도 할 텐데. 내 전화를 받으면 또 우시겠지. 그래도 난 신경질 안 내고 차분하게 말할 거다. 이 셋째 딸, 엉뚱한 짓은 해도 허튼짓은 안 할 테니 아무 걱정 말라고. 앞으로 펼쳐질 내 맹활약을 기대하라고,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마음껏 뻐길 수 있게, 적어도 부끄럽지 않게 해드릴 테니 두고 보라고. 그리고 살아생전에는 쑥스러워 못 했던 말도 눈 딱 감고 할 거다.

엄마, 날 이렇게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세계시민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