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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새벽 다섯 시

바람아님 2016. 2. 26. 00:07
국민일보 2016.02.25. 17:32

새벽 다섯 시. 며칠 전부터 이 무렵 잠이 깬다. 낮에 마시는 커피의 양이 늘어난 건가. 잠자리를 옮긴 탓인가. 어디선가 양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며칠 내내 이 시각에 그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물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일까.

이사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이웃일지도 모르는 두어 사람과 마주쳤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만난 사람과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이름도 직업도 모른다. 정말 이웃인지도 모르고, 이웃이라면 내가 사는 집의 아래 위 옆 어느 곳에 사는지도 모르고, 식구가 몇 명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사람은 새벽마다 일어나 화장실에 가는 오랜 습관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울한 일이 있어서 며칠 속이 안 좋았거나 잠을 설쳤는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 정보는 전혀 모르면서도, 친밀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사소하지만 내밀한 사실을, 뜻하지 않게, 알게 되었다.


이것은 한 동네에 살면서 오랜 시간 들락날락하는 가운데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가 어떤 날씨를 좋아하는지,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지, 무슨 말을 들으면 벌컥 화를 내는지 알려주는 바가 전혀 없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지 줄무늬 잠옷을 입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빠르게 쿵쿵 울리는 발자국 소리로 미루어 보면 성격이 급할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할 뿐.


내가 누워 있는 공간과 그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은 아주 가깝다. 공간적 거리는 가깝지만, 심리적 거리는 아주 멀어서 나는 그를 온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소음으로 인식한다. 나 또한 이 건물에 잠들어 있는 누군가에게 정적을 깨뜨리는 성가신 소음으로 인식될 것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향해 걸어간다.


부희령(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