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살며 사랑하며-안현미] 직업윤리

바람아님 2016. 2. 29. 00:14
국민일보 2016.02.28. 17:42

빨래를 돌리고 쌀을 씻어 안치고 청소를 한다. 분주했던 일주일 동안 치우지 못한 일상들이 하나둘 정리되는 토요일의 이 시간을 무엇과도 바꿀 생각이 없는 나는 만나서 브런치나 먹자는 친구의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한 주 동안 매일매일 야근을 하고 심지어는 새벽 세 시까지 일하다 돌아온 날도 있는데 상사에게 그렇게 일할 거라면 조직을 떠나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일주일이 아닌가. 잘잘못을 차치하고라도 깊이 상처받은 일주일 끝에 맞이하는 휴일을 친구를 만나 맛집 순례나 하며 하루를 보낼 마음의 여유가 내게 남아 있기나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는 고프고 김치와 김밖에 없는 단출한 밥상을 차리고 혼자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며 생각한다. 밥과 책을 사려면 돈이 필요해. 내게는 부자 부모도 고액 연봉을 받는 자식도 없어. 그렇다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나라고 왜 모르겠는가. 다만 억울해서 그런 거지. 새벽 세 시까지 일할 수밖에 없었던 근무 상황이나 고충은 고려되었는가. 직업윤리 운운하며 폭언을 퍼붓기 전에 부하 직원이 어떤 애로사항이 있어 일의 진전이 없는지 파악해볼 생각은 해보았는가. 자기 생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는 로봇이 아니라 부하 직원도 인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는가. 안다. 세상에는 그런 상사가 없다는 것을. 아니 아주 희소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의 이런 물음들이 다 소용없는 물음들이란 것을 나라고 왜 모르겠는가. 다만 답답해서 그런 거지.


모든 사랑이 그렇듯 모든 일은 손발이 맞아야 한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기준만 강요해서는 일이 잘 돌아갈 수 없다. 나라고 왜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 않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원하는 대로 로봇처럼 해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것이다. 안 하는 게 아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일요일에도 출근한다. 이게 나의 직업윤리다.


안현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