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노트북을 열며] 카리스마 없는 정치에 대한 기대

바람아님 2016. 5. 14. 00:20
중앙일보 2016.05.13. 00:35

“지난 시절을 보면 대통령 중심제라고는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지난달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간담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취임 후 경제를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국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항변이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을 들으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급이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3개월여 만인 2003년 5월 21일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고 말했다. 5·18 행사 관계자들과 당시 한총련의 시위에 대해 대화하면서다. 두 발언 모두 받아들이는 측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고 상황도 다르지만, 대통령이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한 것은 공통적이다.

김성탁 정치국제부문 차장
김성탁 정치국제부문 차장

박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그들의 이름을 내건 세력이 존재하는 정치인이다. ‘친박’과 ‘친노’의 영향력은 진행형이다. 새누리당의 4·13 총선 패배는 박 대통령과 친박에 대한 심판으로 규정됐고, 야권은 ‘친노 패권주의’로 갈등하다 분당했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동교동계’ ‘상도동계’로 불린 것을 보면 친박·친노 세력의 응집력이 더 강한 것도 같다. 그런 이들도 한계를 느끼는 셈이다.


3김 시대 이후 노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은 대표적인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5공 청문회에서 명패를 집어던지고 지역주의에 맞선 ‘바보 노무현’은 격정적 언어로 지지층을 사로잡았다. ‘원칙을 고수하는 정치인’ 이미지를 각인시킨 박 대통령은 견고한 지지층으로 ‘선거의 여왕’ 역할을 했다. 하지만 3당 체제를 낳은 20대 총선 결과 ‘카리스마 정치’는 퇴조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젠 맹목적인 팬클럽을 갖고 있지 않은 정치인에게 기대를 걸어보면 좋겠다. 그동안 우리는 대통령감이라면 으레 확실한 지역 기반과 콘크리트 지지층을 바탕으로 세력을 좌지우지할 리더십을 갖기를 원해 왔다. 기존 정치권에 그런 사람이 없으면 외부 인사들에게 지지를 몰아주며 카리스마 넘치는 대통령감이 되길 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토로에서 보듯 대통령직은 누가 하더라도 혼자만의 역량으로 성과를 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유권자가 눈높이를 바꾸면 오히려 경쟁과 협력의 정치가 구현될지 모르겠다. 권력 구조를 바꾸는 게 쉽지 않다면 카리스마 대신 다른 정당이나 세력과 협의해 성과를 낸다는 정신을 가진 고만고만한 정치인들 중에 리더를 뽑았으면 한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여야에 훌륭한 대통령감이 넘친다. 누구는 화끈한 맛은 없지만 원칙을 지킬 것 같고, 누구는 공존하는 권력을 추구하며, 또 다른 누구는 소통을 잘할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성과를 내고 있고, 어떤 이는 지역주의 극복에 매진했으며, 또 어떤 이는 정당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 카리스마 시대의 종언은 이들이 펼칠 협치의 무대가 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성탁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