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5.20 최수현 문화부 기자)
몇 년 전 한 골프 선수의 우승 기자회견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언니 얘기가 나오자 기자들이 직업을 물었다.
"언니는 공부해요."(선수)
"대학생이에요?"(기자)
"아뇨, 그냥 공부해요."(선수)
"재수생이에요?"(기자) "
…재수생이 뭐예요?"(선수)
놀란 기자들이 "재수생 몰라요?" 하고 묻자 그는 "그런 데 관심이 없어서요"라고 했다.
최근 걸그룹 멤버 설현과 지민이 등장한 예능 프로그램 역시 비슷한 충격을 안겼다.
두 사람은 링컨, 김구, 스티브 잡스 얼굴을 알아맞혔지만 안중근에서 막혔다.
"이런 데 무지해요"라며 인터넷을 검색해 "긴또깡(김두한의 일본식 발음)"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이름을 불러댔다.
인터넷에선 '설현 잘못이다, 아니다' 논란이 붙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안중근 의사 얼굴을 못 알아본 것은 당연하다.
역사 지식을 쌓을 기회가 없었으니 역사의식이 생겨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 인물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지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들이 상황을 판단하거나 맥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초 상식과 분별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데 있다.
정작 걱정되는 건 이들의 미래다.
스포츠·연예계 지망생들은 학교생활을 거의 포기한 채 '운동 기계' '춤 기계' '노래 기계'로 성장한다.
공부는 아예 손 놓았고, 또래의 평범한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도 별로 없다.
소통 능력과 상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은퇴 10년째인 전직 운동선수들을 상대로 설문해본 적이 있다.
60% 이상이 스포츠와 무관한 일을 하고 있었고, 정규직 종사자는 3명 중 1명꼴에 불과했다.
자녀도 운동선수 되면 좋겠다는 사람이 30%에 못 미쳤다.
"학창 시절 학교도 거의 못 가봤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거나 폭넓은 경험을 해보지도 못했다. 오직 운동만 했다.
은퇴 후 사회 적응 정말 힘들었다. 내 자식은 절대 운동 안 시킨다"는 사람이 많았다.
지난달 16년 만에 재결합한 젝스키스 TV 공연이 눈물겨웠던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아이돌 그룹의 효시나 다름없는 멤버 6명은 3년간 최고 인기를 누리다 준비 없이 팀 해체를 맞고 나서
뒤늦은 성장통을 겪었다.
그것도 극심하게. 사기, 이혼, 탈영…. 이들을 보호·관리해줄 시스템은 없었다.
객석을 메운 팬들 앞에서 멤버들은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라며 울먹였다.
반가움과 안타까움에 같이 울었다는 시청자가 많았다.
스포츠와 연예계에 뛰어들어 승승장구하는 듯해도 실력의 정점을 지나고 인기도 사그라지는 날이 온다.
청춘을 소모하게 해 이득을 챙기려는 이들은 그 후로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젊은이의 긴 인생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누가 우리 청년들을 기계로 만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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