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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 지배 거부한 쇼와 육군, 일제 패망 불러오다

바람아님 2016. 8. 14. 19:42

(출처-조선일보 2016.08.13 선우정 논설위원)

러·일전쟁 승리 잘나가던 일본, 2차 대전에선 왜 패전국이 됐나
발로 뛰어 담아낸 1100쪽 르포… 무모한 군부… 8·15 해방 단서 있어
해체됐던 쇼와 육군 6·25로 집결, 현명한 대비 없으면 또 당할 수도

쇼와 육군 책 사진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ㅣ정선태 옮김

글항아리ㅣ1136쪽ㅣ5만4000원


전전(戰前) 일본사를 읽을 때 이런 추리를 하면 재미가 더하다. 

'일본군이 똑똑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당시 식민지 중 2차 대전이 종결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나라는 별로 없다. 

인도는 2년 후인 1947년, 인도네시아는 4년 후인 1949년, 알제리는 17년 후인 1962년 

각각 독립을 이뤘다. 무슨 차이일까. 이들 나라는 2차 대전 승전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이다. 

한국이 종전과 동시에 해방된 것은 일본이 졌기 때문이다. 

그 패전이 당시 군부의 무모함과 멍청함, 비겁함 탓이라면 1100쪽이 넘는 이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해방의 중요한 단서를 하나둘 찾아낼 수 있다.

우리 역사를 읽으면 20세기 초 일본은 악의 화신이다. 

그런 눈으로 당시 세계사를 보면 당혹, 분노에 몸을 떨 수도 있다. 

러·일 전쟁의 일본 승리는 아시아인에게 "민족 독립의 각성제(중국 쑨원)"이자 "위대한 구원(인도 네루)"이었다. 

일본은 1차 대전 때도 영리하게 움직였다. 

승전국에 끼어들어 패전국 독일의 아시아 권익을 쓸어담았다. 

그들이 뱀 같은 총기를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71년 전 8·15가 아닌 훗날 어떤 다른 날에 해방을 기념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행일까. 그렇게 잘나가던 일본이 2차 대전 땐 패전국으로 나가떨어졌다. 

쇼와(昭和) 천황이 즉위한 1926년부터 2차 대전 종전까지 19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잘나가던 일본이 그 모양이 됐을까. 저자는 방대한 취재로 이 질문에 답한다.

중·일전쟁에 돌입한 1938년 1월 일본 쇼와 천황이 육군 열병식에 참석해 백마를 타고 군대를 사열하고 있다. 쇼와 천황은 쇼와시대 육군의 절대적 존재였으나 전쟁 책임에서 벗어나 1989년까지 군림했다.
중·일전쟁에 돌입한 1938년 1월 일본 쇼와 천황이 육군 열병식에 참석해 백마를 타고 군대를 사열하고 있다. 쇼와 천황은 
쇼와시대 육군의 절대적 존재였으나 전쟁 책임에서 벗어나 1989년까지 군림했다. /아사히신문 ‘주간 20세기 황실의 100년’

쇼와 전쟁사엔 언제나 '통수권 간섭'이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복잡하지만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통수권은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뜻한다. 

물론 국가 원수인 천황의 대권이었다. 

당시 일본은 천황에서 직접 군부로 이어지는 통수권 체계를 만들었다. 

통수권에서 내각을 배제해 문민 지배를 봉쇄한 것이다. 

이로써 군부에 대한 내각의 견제는 천황 대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공격받았다. 이른바 '통수권 간섭 문제'다. 

제국 헌법의 최대 맹점으로 꼽히는 이 체계가 '일본을 붕괴시켰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여기서 미묘한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전쟁은 누구 책임인가. 

헌법의 통수권 규정에 따르면 명백히 천황이다. 하지만 일본 역사가 대부분은 이 지점에서 눈을 돌린다. 

천황은 군림했으나 판단·지시·명령을 하지 않은 존재로 단정한다. 통수권은 사실상 쇼와 군부 것이었다. 

그들은 천황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폭주(暴走)했다. 따라서 책임도 군부 몫이다. 이 책도 이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쇼와 육군이 천황에게 판단을 요청한 사례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책의 사관(史觀)은 한국 독자의 입맛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 특별하지도 않다.


다만 이런 해석이 왜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은 헤이시(平氏) 정권이 수립된 1160년부터 사무라이 지배가 이어졌다. 

제국 일본을 만든 메이지유신도 그들 작품이다. 피로 쟁취한 권력을 껍데기 같은 국왕에게 통째로 바쳤겠는가. 

일본의 무인시대는 사실상 1945년 패전까지 이어졌다. 

최종회 주인공이 바로 '쇼와 육군'이다. 

800년 가까이 이어진 사무라이 시대의 단말마적 종말이란 관점도 읽는 재미를 더할 듯하다.

이 책은 쇼와 육군의 흥망사를 1928년 장쭤린(張作霖) 폭살 사건에서 시작했다. 

천황 통수권이 왜곡돼 '미·중과의 동시 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불나방 모험에 빠져든 출발점이다. 

그 후 만주사변, 2·26사건, 중·일 전쟁, 노몬한 사건, 동·남방 아시아 침략, 진주만 공격, 원폭, 패전까지. 

음모, 월권, 무지, 무모, 우둔, 배신, 비겁… 쇼와 육군의 더러운 군상이 차례로 드러난다. 

반세기 역사를 훑고 있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개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 책이 새롭고 흥미진진한 건 주인공의 천태만상을 다양한 사람의 증언과 다양한 사료를 통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로 뛰어 차곡차곡 만드는 일본 르포르타주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 8명 중 7명이 일본 육군 출신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이런 자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간 우리 선대의 비애와 고통도 책을 통해 공감할 수 있다. 특히 패전으로 해체된 

쇼와 육군이 6·25 전쟁을 통해 다시 집결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는 후반부의 기록은 두고두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무모하고 비겁하면 쇼와 육군의 망령은 반드시 책 속에서 튀어나와 다시 한반도에 예리한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