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2.21 박두식 부국장 겸 사회부장)
문재인 전 대표가 최근 쏟아낸 외교·안보 발언에서
일관되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전략 부재, 철학의 빈곤이다
그는 '거래의 달인' 트럼프 변수를 생각해 봤을까
문재인 전(前)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실향민의 자식이다.
그의 부모는 6·25전쟁 때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미군 함정을 타고 월남했다.
문 전 대표의 출생지인 경남 거제는 부모가 처음 피란살이했던 곳이다.
문 전 대표는 엊그제 서울 남대문 세브란스빌딩을 찾았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고(故)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미군 통역 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한 현 박사는 미군을 설득해 10만명 가까운 민간인을 미군 함정으로
피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행사 주최 측은 문 전 대표를 초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와 당시 피란민의 후손을 비롯한 관계자 40~50여명이 참석한 소규모 행사였다.
그런데 이날 오전 문 전 대표 측이 참석하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다는 것이다.
문 전 대표 측 인사는 "문 전 대표가 이 행사 소식을 듣고 꼭 가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문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현 박사님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북한 공산 치하를 탈출하고 싶어 했던 10만명은 대한민국으로
피란 내려올 수 없었을 것이고 저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했다.
문 전 대표가 '실향민 부모'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 겨뤘던 2012년 대선 유세에서도 가족사를 언급했다.
그 무렵 문 전 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으로 새누리당의 거친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2007년 북한 김정일과 회담하면서 NLL을 포기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게 새누리당 주장이었다.
문 전 대표는 "노무현 정부는 확실하게 NLL을 지켰다"고 했지만
노 전 대통령이 회담에서 김정일에게 '저하고…' '여쭤보고 싶은' 같은 극존칭을 썼다는 사실까지 나오면서
난감한 처지에 몰렸다.
그때 문 전 대표가 유세에서 했던 말이 "나는 북한의 공산주의가 싫어서 피란을 내려온 실향민의 아들이다.
군 복무도 떳떳하게 마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누가 안보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문 전 대표에게 '실향민의 자식'이라는 것과 '군 복무'는 자신을 바라보는 보수층의 불안감을 달래주는 보증수표 비슷한
존재인 모양이다.
그는 2011년 봄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특전사 복무 사실을 공개하면서 격파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2012년 대선에서 패하고 나서도 외교·안보 문제만큼은 지지층에 얽매이지 않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다.
기회 있을 때마다 군부대를 찾고 신(新)안보 정책을 내놓은 게 그 예다.
그러나 실제 문 전 대표의 외교·안보 구상이나 정책은 그가 만들려고 노력해온 이미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문 전 대표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북한과 미국 둘 다 갈 수 있다면 어딜 먼저 가겠느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말한다.
나는 북한을 먼저 가겠다"고 답했다.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끝까지 반대했다"고도 했다.
그의 책 '운명'을 보면 그가 내건 파병 반대 이유가 나온다.
정의로운 전쟁이라 보기 어렵고, 희생자가 발생하면 국내 비난 여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노 전 대통령은 이 문제를 '정의 대 불의'라는 도덕주의적 틀을 뛰어넘어 어느 쪽이 국익(國益)에 부합하는가를 놓고
고민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났고, 이제는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대선 주자가 된 문 전 대표가 새삼 '끝까지 반대했다'는
과거의 태도를 자랑스럽게 밝히는 것을 보면 외교·안보 사안을 보는 그의 안목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가 최근 외신 기자 간담회에서 밝힌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전면 재검토 방침에서도 전략 부재, 철학 빈곤이 느껴진다.
그는 미국이 주도한 주요 안보 정책에 사실상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도 '한·미 동맹엔 큰 변화가 없을 것이고 계속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했다. 외교·안보 정책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성역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미국보다 북한 먼저 방문하고, 미국과 협의하에 진행해 온 안보 조치를 재검토하겠다는 말부터 앞세우는
문 전 대표를 미국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문 전 대표의 사드 입장은 중국의 기를 살려주고 대신 미국엔 실망만 안겨주는 일방적 조치에 가깝다.
지금 미국은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이라는 책을 펴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트럼프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리는 거래다.
그 책의 첫 문장이 '나는 돈 때문에 거래하는 것은 아니다. 돈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거래 자체를 위해서 거래를 한다'이다.
한국의 대통령을 꿈꾸는 문 전 대표가 이런 대목까지 고민한 끝에 일련의 외교·안보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외교나 동맹 모두 공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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