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11.09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역사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피가 섞여본 적이 있는지. 예전에는 핀란드 사람들은 대체로 핀란드 사람들끼리 피를 섞었고,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은 그저 우리들끼리 결혼하여 애 낳고 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종족 간 결혼이 엄청나게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쟁 통에 억지로 피가 섞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대규모의 피 섞임이 일어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가끔 그저 넉넉잡고 한 500년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삶에 대한 애착이 특별히 남달라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보고 싶다. 도대체 인류가 어떻게 변할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약 5만년 전 우리 인류가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지구 여러 곳에 흩어져 독립된 개체군(population)으로 살다가 다시금 하나의 거대한 개체군으로 묶이고 있다.
이 같은 피 섞임은 각각의 개체군에는 당장 새로운 유전적 변이를 제공하지만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그동안 개별적으로 구축해온 변이의 다양성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어떤 모습의 '신인류'로 변화할지 정말 궁금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천년만년 살게 해 달라고 빌 수는 없고, 한 500년이면 변화의 조짐 정도는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빌어본다.
지금 우리 농촌의 결혼은 거의 절반이 국제결혼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다민족 국가로 변하고 있다. 대원군의 자손입네, 단일민족이네 하는 편견을 고수할 때가 아니다. 섞이는 피에 문화가 묻어와 한데 뒤섞이고 있다. 문화와 과학이 섞이고 예술과 기술이 섞인다. 동양과 서양 음식이 섞여 퓨전음식 천지이다.
언제 정말 한가한 시간이 나면 백지 위에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변에서 절대로 섞이지 않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보라. 몇 개 못 적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섞임의 급류에 휩싸여 어디론가 마구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21세기 초반 이 시대를 '혼화의 시대'로 규정해본다. 다름이 어우러져 새로움으로 거듭나고 있다. 섞임을 거부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섞임의 선봉에 서야 한다. 우리와 가족이 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기 위해, 왠지 우리 곁에 있고 싶어 이 땅에 온 이들을 우리 가족으로 보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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