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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석유 富國 베네수엘라 국민은 왜 쓰레기통을 뒤지게 됐나

바람아님 2017. 5. 1. 06:59

(조선일보 2017.05.01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임금 올려 경제 살리겠다는 公約, 南美에서 실패 사례 수두룩해

돈을 뿌려 반짝인기 얻어봐야 성장 동력 없인 결국 파산할 뿐

페론·산디니스타·차베스가 증명한 '실패한 포퓰리즘' 되풀이할 건가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지난 28일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심상정 후보가 소득 주도 성장의 구체적 경로를 묻는 

유승민 후보에게 경제성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질타했을 때 실소를 금하기 어려웠다. 

현재 문재인 후보와 심 후보가 공히 소득 주도 성장이란 슬로건하에 분배가 성장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날 두 후보는 자신들이 좀 더 한국적인 새로운 경제성장론을 주창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듯했다.


그런데 임금을 올려 돈이 돌게 함으로써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심 후보 주장은 지겨울 정도로 반복된 

주장이다. 원조는 1950년대 아르헨티나의 페론 대통령인데, 단지 좌파에 국한된 주장도 아니다. 

칠레의 아옌데, 1970년대 브라질의 바르가스 우파 정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최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마두로 정권 등 우파, 혁명 정부, 좌파를 가리지 않고 같은 주장을 이어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초반에 폭발적 인기를 누리다가 국가 경제를 망쳐왔는데, 이들을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물론 상황에 따라 소득보다 소비가 왜소해 수요 부족과 가동률 저하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신용카드 한도를 높이거나 소비세를 인하해 소비를 진작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정부가 직접 돈을 풀 수도 있다. 

이런 조치를 케인스식 유효수요이론에 따른 처방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각국의 경험과 학문적 연구들은 지출을 늘리는 것만으론 일시적 경기 진작이나 심리적 부양을 

가져올 수 있을지언정 지속적 성장을 견인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왔다. 예를 들어 각 가정의 소비가 벌어들일 수 있는 

돈보다 크다면 해당 가구나 지역, 나라 경제에 잠깐의 활력을 가져올 수는 있겠으나 결국은 가계 파산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지속 가능한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가구의 소득 창출 능력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근로자가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이나 질이 향상되지 않은 상태에서 심 후보의 제안처럼 임금을 대폭 인상해 

내수를 진작하는 것이 얼마나 지속될까. 아니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열악한 수익성을 고려하면 인건비 압박으로 공장문을 

닫거나 근로자를 대거 해고해야 할 테니 내수가 애당초 진작되지도 않을 것이다. 

벌 수 있는 수준을 초과한 지출은 국가와 기업, 가계 모두에서 유지될 수 없다.


케인스식 처방의 대표격으로 언급되는 뉴딜 정책마저도 경제사 연구들에 의하면 실제의 효과가 뚜렷하지 않다. 

수요 진작책이 대공황 당시에는 매우 새롭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국민으로 하여금 낙관적 기대를 하게 한 부분적 의의를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즉 돈을 풀어 경제성장을 지속시킨 사례는 이론뿐 아니라 그간의 역사에서도 찾기 어렵다.


지금 우리 경제의 핵심 문제가 생산 능력에 비해 소비가 왜소해 발생하는 일시적 순환 장애이며, 

이것 때문에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고 진단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인위적으로 시장임금을 올리고 소득을 나눠줌으로써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번지수가 한참 벗어났다.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역량과 기회를 확대하는 것 말고는 우회로도 왕도도 없다.


물론 분배 개선은 그 자체로 중요한 정책 목표이다. 

더구나 분배의 개선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소득 창출 기회를 확산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경우 인적·물적 자본 축적을 통해 

장기적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널리 동의된다. 그러나 소득 주도 성장으로 포장된 포퓰리즘은 돈을 뿌려 내수를 

확대시킴으로써 직접 성장률을 높이고 유지할 수 있다는 달콤함이 핵심이다.


요즘 화제가 되는 베네수엘라는 풍부한 원유 자원과 안정적 경제정책으로 남미의 모범으로 꼽혔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선심 정책과 그 실패로 유명해졌다. 차베스 치하에서 정부 지출 비중은 두 배 가까이 증가했으나 지난해 국민 4명 중 3명의 

체중이 평균 8.7% 줄었다. 

몇 주 전 외신에서는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노상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개별 실패 사례의 심각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실패가 되풀이되는지이다. 

페론의 실패를 목도했음에도 남미 국가들이 심심찮게 동일한 정책을 반복해왔고 21세기 한국에서도 쌍둥이 같은 

주장이 횡행하는 것은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남미의 경제 자문으로 오래 활약한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1989년 '남미의 사회 갈등과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논문에서 포퓰리즘 정책이 초래할 결과의 심각성에 대한 정치가들의 

무지와 정부 차원의 기억(institutional memories) 상실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포퓰리스트 페론 대통령의 부인 에비타를 주인공 삼아 부른 팝송이 '나를 위해 울지 마오, 아르헨티나여'다. 

지금 이 노래를 바꿔 부르라면 '내 실패를 잊지 마오, 아르헨티나여'여야 한다. 

역사 의식과 이론적 이해 모두가 아쉬운 선거 국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