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두 장의 특사 사진

바람아님 2017. 5. 23. 14:49

조선일보 : 2017.05.22 03:08

조선 인조가 청 태종 발 아래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했다. 세 번 절하고 각각 세 번 머리를 땅에 닿게 하는 것이다. 당시 청나라에선 예외 없이 적용되는 황제에 대한 예법이었다. 다른 나라 사절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외교 문제가 된 건 '중화 질서' 밖에 있던 서양 국가들이 중국과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1793년 국왕 조지 3세의 친서(親書)를 들고 온 영국 사절단에 중국은 '삼배구고두'를 요구했다. 23년 뒤 파견한 사절단도 똑같은 요구를 받자 영국은 발톱을 드러냈다. 무력을 앞세워 대륙으로 밀고 들어갔다. 중국이 외국 사절에게 서서 인사하는 '입례(立禮)'를 허용한 건 영국의 함포(艦砲)에 아프게 당한 뒤였다. 

[만물상] 두 장의 특사 사진
▶1883년 국왕 친서를 들고 미국에 온 조선 사절의 모습이 미 신문에 삽화로 크게 실렸다. 사대(事大)에 익숙했던 탓일까. 민영익·홍영식 등 당대 조선의 권세가들이 대통령 집무실 문지방도 넘기 전에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절을 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됐다. 체스터 아서 당시 대통령은 당황한 듯하다. 악수를 하려고 든 오른팔을 수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함께 절을 하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훨씬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사절을 맞았다고 한다.

▶무력을 포기하다시피 했던 약소국 조선은 살아남기 위해 '삼배구고두' 같은 굴욕도 거부하기 어려웠다. 조선 초 중국에 파견된 사신 중엔 국모(國母) 서거 소식을 듣고 명 태조가 하사한 옷 대신 상복(喪服)을 입었다가 '황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목이 잘린 경우까지 있다. 조선은 이런 일을 당하고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수백 년 전의 일들이다.

▶그제 조선일보에 미국과 중국 정상이 우리 특사(特使)와 찍은 사진이 실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혼자 앉아 있고 나머지는 옆에 서서 찍었다. 시진핑 주석은 4년 전에 우리 특사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사를 멀찌감치 앉게 했다. 재벌 회장에게 보고하러 온 계열사 사장 모습이 연출됐다. 미·중 정상 두 사람 모두 특이하긴 하다. 트럼프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테고 시 주석도 갈수록 '황제' 흉내를 낸다고 한다. 특사는 나라를 대표한 사람이다. 그래서 정상과 나란히 앉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이런 장면에 유독 민감하다는 얘기도 있다. 일본은 국익에 유리하면 대국에 비굴해 보이는 모습을 일부러 연출하기도 한다. 어쨌든 두 사진이 한국 외교의 앞날을 예고하는 장면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