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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절대적 진실과 정의

바람아님 2017. 9. 16. 09:43
문화일보 2017.09.15. 14:40


야생동물을 동물원에 가두는 것은 자유를 박탈하는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2002년 부커상 수상자 얀 마텔은 ‘파이 이야기’의 서두에서,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동물의 입장에서는, 비정하고 거친 자연보다는 편안한 곳에서 때가 되면 풍족한 먹이를 주는 동물원이 훨씬 더 살기 좋은 낙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야생에서는 먹이를 구하기도 힘들고, 천적이나 경쟁자에게 잔인하게 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물원의 동물을 풀어주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동물에게는 오히려 추방이자 사형선고가 될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마텔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시사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 역시 “진리란 당대의 지식과 권력이 담합해서 만들어낸 담론일 뿐”이어서, 시대나 정권이 바뀌면 진리도 허위가 된다고 지적한다.


유명한 ‘하이데거-샤피로의 구두 논쟁’은 그 문제에 대해 우리를 깨우쳐준다. ‘예술작품의 기원’이라는 글에서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화가 반 고흐가 그린 구두에 대해 논하면서 “이 한 켤레의 구두에는 농부의 땀과 수고가 깃들어 있다”고 썼다. 그러자 미국 미술평론가 마이어 샤피로가 “그건 고흐가 목사로 일할 때 신고 다녔던 구두로서, 농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반론을 폈다.


서로 자기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의 논쟁이 격렬해지자,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나서서, 두 사람의 열띤 논쟁을 간단히 해체했다. ‘그림 속의 진실’이라는 글에서 데리다는 “그림을 자세히 보라. 내게는 한 켤레가 아니라, 둘 다 왼쪽 구두처럼 보인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보니, 과연 그건 둘 다 왼쪽 구두처럼 보였다.


그건 ‘정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오래전, 네덜란드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한 미국의 언어학자 에이브럼 놈 촘스키와 미셸 푸코에게 사회자가 “인간은 왜 정치적 폭력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촘스키는 즉시 “정의를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의라는 말 자체에 회의적입니다. 정의는 독재자도, 또는 독재에 투쟁하는 사람도 내세울 수 있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다분히 임의적입니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마이클 샌들은 ‘정의(正義)란 결코 단순하게 정의(定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샌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순찰 중에 만난 염소치기 소년을 차마 죽일 수가 없어서 살려 보냈다가, 그 소년이 탈레반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몰살당한 미 해병 순찰대의 경우를 예로 든다. 교본대로 소년을 죽이고 해병대가 살아남는 것이 정의인지, 아니면 어린 소년을 살려 보내고 대신 해병대원들이 죽는 것이 정의인지는 참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샌들은 또, 영국의 불임부부가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인도의 대리모를 이용해 인공수정으로 아기를 낳으면 불과 4500달러면 된다. 하지만, 가정부로 한 달에 25달러를 버는 인도 여성에게는 그 돈이면 집도 사고 적어도 15년을 안정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것이 정의인가” 하고 샌들은 독자에게 되묻는다. 또, 샌들은 미국 남북전쟁 때, 군 복무 면제 비용을 내고 전장(戰場)에 안 나간 사람들 가운데 앤드루 카네기, J P 모건,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버지도 들어 있었다고 말한다. 만일 이들의 아버지가 전장에 나가 전사했다면,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위 네 사람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인데, 과연 어느 것이 정의냐는 것이다.


샌들은 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의 SF 단편 ‘해리슨 버저론’을 예로 들면서,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영리한 사람은 20초마다 뇌에 전기충격을 주고, 잘생긴 사람은 가면을 쓰게 하며, 춤을 잘 추는 댄서는 다리에 무거운 추를 달게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사회정의인지 묻는다. 샌들은 윤리적 문제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안락사의 경우에도, 어떤 것이 정의인지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올해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도선우의 ‘저스티스맨’도 자신만이 정의라고 믿는 순간, 그것이 곧 독선이 되고 타자에 대한 폭력과 횡포가 된다는 사실을 ‘저스티스맨’이라는 연쇄살인범을 통해 깨우쳐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앵무새 죽이기’로 널리 알려진 하퍼 리의 최근 소설 ‘파수꾼’도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 뉴욕에서 잠시 고향에 돌아온 진 루이스 핀치는 젊었을 때 흑인을 옹호하던 아버지 애티커스가 나이 들어서는 백인들의 흑인 비판 모임에 나가자 그를 비난한다. 그러자 그녀의 숙부는 이렇게 말한다. “네 양심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각자 자기만의 양심의 파수꾼을 갖고 있단다. 네 아버지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단지 연방정부가 너무 앞서가는 것과 일부 흑인들의 급진적 태도를 우려하는 거란다.” 진 루이스는 자신만이 정의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 애티커스도 또 다른 정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진리와 허위, 또는 정의와 불의로만 보는 사람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얽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검은색과 흰색만 볼 뿐, 그사이의 수많은 다른 색의 스펙트럼은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그건 얼마나 어둡고 단조로운 삶이 될 것인가? 하늘에는 밝고 아름다운, 컬러풀한 무지개가 떠 있는데.